산 지미냐노(San Gimignano)
"모든 것은 움직임 없는 고요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것은 그곳으로 돌아간다..." - 마리오 루치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차를 몰고 서북방향으로 50분 정도 올라가면 언덕 위의 중세 도시 산 지미냐노를 만나게 된다. 해발 300m에 자리한 이 도시에 다다르기 위해 나는 언덕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시에나에서 3일을 보낸 나는 지인의 추천으로 아무런 정보 없이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중세의 도시 산 지미냐노에 들어서자 메인 거리에는 각종 상점과 음시점들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큰길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그 이면에 주택가들이 모여 있었는데 우연히 들른 두오모 성당에서 꽤 많은 주민들이 모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꽤 익숙한 찬송가를 불러서 나도 한국말로 따라 불렀다. 수백 년 전 이곳에서 불려졌던 찬송가가 변함없이 불려지고 그것을 둘러싼 변치 않는 토스카나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시대를 초월하여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성당을 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성벽으로 둘러싸인 탑에 이르게 되었다. 중세시대 때, 도시 내의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자신의 부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탑을 세웠는데 그 수가 72개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이 탑에 올라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포도밭, 올리브나무 숲, 밀밭들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색감으로 물들이고 있어 토스카나 지역의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광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경험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종탑이 있는 성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는데 정말 오랜만에, 자연의 빛이 아무런 저항 없이 공기 중에 퍼지면서 온갖 나무와 풀과 꽃 잎들과의 색감의 향연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음미하였다. 토스카나의 대기는 습도가 낮고 미세 먼지가 적어 청명하고 따뜻한 노란빛을 띠는데 이를 토스카나 골드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초록의 나무는 좀 더 연둣빛이 감돌고 노란 꽃잎에서는 레몬빛의 음영이 어른거렸다. 빛이 닿는 모든 것들에 부드러운 파우더를 두드려 놓은 것처럼 뽀얗고 보들거렸다.
마치 요새와 같이 만들어졌던 그 예전의 도시는 높고 경계가 삼엄했으며 수많은 탑들로 과시가 충만하였지만 이제 그곳에서 우리가 바라보았던 것, 남겨진 것은 변함없는 자연의 빛과 색이었다. 인간은 경계하고 경쟁하며 탑을 지었지만 지금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말없이 감싸 안는 영원한 자연의 빛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애쓰며 살아가는가.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 가치가 있는 것들일까.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작년 봄 보았던 중세의 흔적과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진 후 남겨진 것들을 기억하면서, 아무리 혼란스러운 세상의 소리가, 폭력의 소용돌이가 몰아쳐도 그것들은 곧 휩쓸려 사라질 것들임을 안다. 중요한 것들은, 가치 있는 것들은 지켜질 것이다. 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속의 빛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