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사랑" (C.S. Lewis 저) 을 읽고,
피제트 부인이 죽자 그 가족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참으로 놀라운 지경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졌고 심지어 웃기도 하며, 불만과 신경질이 가득했던 작은 아들에게서 상당히 인간성이 좋은 아이의 모습이 드러났고 집에서는 잠만 자고 나가던 큰 아들은 정원손질을 기쁨으로 하였다. 허약하게만 보였던 딸아이가 밤새 춤을 추기도 하고 테니스를 몇 시간씩 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집에서 기르던 개까지도 활기를 띠며 동네의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피제트 부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는 가족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였다. 가족의 모든 빨래를 도맡아 했고 한 사람이라도 집에 있으면 따뜻한 음식을 차려주었고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는 가족을 위해 새벽이라 할지라도 자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아마추어 양재사로 뜨개질의 달인이었던 그녀는 가족의 옷을 손수 만들어 입히기를 즐겨했다. 허약한 딸을 극진히 보살피고 온 몸을 희생해서 가족을 돌보았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어땠을까?
더러운 옷을 세탁소에 맡길 경제적인 여유가 되었기에, 가족들은 온 가족의 빨래를 도맡아 하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고, 매 끼니에 차려지는 따뜻한 음식이 부담스러워 차가운 음식을 좋아한다고 항변해야 했으며, 힘없고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로 인해 귀가가 늦어지면 늘 마음이 초조했다. 자신들을 위해 힘들게 만들었을 옷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고 결국에 이 모든 것들을 지켜만 볼 수 없었기에 늘 그녀 옆에서 돕고 돕고 도왔다.
C.S. Lewis는 피제트 부인은 결코 자신이 가족에게 끼친 막대한 고통과 불행을 모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한 이유는 그 일을 그만 둘 경우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을 어떤 진실과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족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진실......
그렇다면 베푸는 사랑과 헌신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자는 “주는 일의 진정한 목표는, 받는 사람이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은 먹이는 것은 머지않아 그들 스스로 먹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머지않아 그들이 우리의 가르침 없이도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선물의 사랑에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사랑은 포기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시간을 보답으로 여겨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비록 일생의 시간을 희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대의 필요가 아니라 그녀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것은 쌍방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내면 깊숙이 숨겨진 자기애, 자기 연민은 사랑, 헌신, 희생, 정의 등의 가치를 자신의 존재감과 위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가정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사랑의 행위 역시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사랑은 사물이 아닌 추상적 개념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개념으로, 사랑한다면 배려하고 알고자 하고 그 대상에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즐거워하며 그 대상을 소생시키고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고 지배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소그룹 모임에서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자식을 키우는 목적이 뭘까요?”
"글쎄요......"
“아이를 잘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그분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이를 잘 떠나보내기 위한 과정 또한 어렵다. 모든 부모가 가장 어렵고 힘든 일, 아이의 삶의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 그 자리를 내어주는 것, 내가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아이가 만들어 가는 길을 미소로 바라봐 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눈길을 보내본다. 내 아이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나? 나의 조바심이 아이의 생명력을 마비시켜 가는 건 아닐까?
"나는 사랑하는 동시에 미워한다."는 오비디우스의 말은 에로스에 해당되지만, 다른 종류의 사랑도 똑같은 여지를 안고 있습니다. 즉 그 사랑 안에 증오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애정이 절대 주권자가 되면, 그 씨앗은 발아하기 시작합니다. 신이 되어 버린 사랑은 악마가 됩니다." (C.S.Lewis, 네 가지 사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