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간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제까지의 나의 모습, 바로 전까지 내가 믿었던 생각의 틀, 평생을 나의 길이라 생각하며 달려온 나의 꿈, 도저히 고쳐질 것 같지 않은 나의 습관, 어느 순간 달라져 버린 관계들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사춘기 아들과 늘 다투는 것들 중에 하나가 데일리 플래너 작성이다. 학습계획표를 매일, 주간, 월간 별로 세우지 않으면 숙제나 시험을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없으니 잘 좀 따라줄 것을 늘 당부해왔다. 사실 딸아이가 스스로 꼼꼼하게 플래너를 썼었고 잘 활용을 했기에 아들놈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아이는 일단 대답을 하나 제대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이든 숙제든 구멍이 생기면 나는 플래너를 쓰지 않는 아이를 타박하며 역정을 냈다. 그러면 아이는 내일부터는 잘할 건데 왜 자신을 야단치냐고 따졌다. 아이의 생각을 잘 들여다보면 과거의 나 때문에 왜 현재의 내가 야단을 맞아야 하냐는 거다. 자기는 내일부터 쓸 생각이 있으므로 야단맞을 이유가 없으며 내일부터 달라지려고 하는데 그 의지를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 요소는 엄마라는 것이다. 참으로 당당하다. 내가 아이를 믿을 수 없었던 배경는 지금까지 아이가 나에게 보여 준 시간들에 기댄 결과였다. 그것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사춘기 놈들 다 이런 거야? 햐아......"
한 3년을 얘기해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아이는 늘 당당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에 반복적으로 좌절감을 겪었다.
사실 이 정도 했는데 안 하면 오히려 그게 더 대단한 아이라는 생각을 해볼 만도 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롤 아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만 했었던 같다. 그러나 이 아이는 좀 다른 아이였다. 자신의 마음이 몰입이 되면 시간표와 상관없이 빠져드는 아이였다. 시간이 가는 줄도 오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늘 지켜보는 마음이 간당간당 하지만 그게 그 아이의 방식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어 내 마음을 거반 내려놓았다 함이 맞다. 내가 원했던 방향으로는 아니지만 아이는 조금씩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아나갔다. 어제의 자신의 모습으로 오늘의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는 아이의 말이 야단을 맞기 싫어서 내뱉었던 괘변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사람은 늘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늘 지난 과거의 연장선에서 생각한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늘 경험에 의지한 생각을 하려고 한다.
강물에 서서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자신의 삶을 떠나 사문의 길을 간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을 산다. 긴 세월 끝에 퇴색된 자신의 모습에 환멸과 역겨움을 느낀다. 그는 맥 빠진 자신의 삶에 필요한 자극을 위해서는 도박과 노름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삶에 어떤 자극이 필요했고 그것이 불안감이라는 요소라 해도 개의치 않았다. 타자를 향한 친절함과 침착함을 잊어버리고 돈에 대해 더욱 지독해지고 인색해지고 흉측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상이라는 덫에 사로잡혀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개 같은 싯다르타, 미친놈이라고 부르며 완전히 파멸해 버려야 한다고 자학한다. 자신의 썩어질 육체와 영혼을 물고기와 악어가 뜯어먹어 버리길, 자신이 악마에게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 버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망고나무 아래서 싯다르타는 마치 죽음에 이른 것처럼 침잠한다. 내면 깊은 속으로 잠잠히 들어가 한 없이 가라앉아 버린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지금까지 지난 온 시간들의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과 이별한 자신을 본다. 마침 다시 태어난 어린아이의 상태와 같은 자신을 깨닫는다. 싯다르타는 또다시 떠난다. 그리고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 오, 과연 그 누가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으리!" (싯다르타 중에서, 헤르만 헤세 저)
헤세는 반복되는 자아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Self)와 투쟁하는 자아(ego)의 죽음은 또 다른 자기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뜻일까? 사춘기 아들 때문에 속상하면, 어린 시절 비디오 앞에서 철 없이 노래하던 아이의 모습을 본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비디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지만 이제 이 어린아이는 어디에도 없다. 뒤돌아보면 10년 전쯤의 나도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다르다. 나는 늘 존재했는데 순간순간 달라지고 있었다, 강물처럼 어제의 내가 가고 내일의 내가 오늘로 왔다. 가버린 것도 '나'고 오고 있는 것도 '나'였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내일의 나는 또 다른 나일테지만 동일한 내가 아닌가. 그때의 나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이기에 지금도 맞고 그때도 맞는 것이 아닐까?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도 맞고 따박따박 말대답에 뻣뻣함이 엄마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사춘기 녀석도 맞다.
매일 다시 태어난다면
친구에게 매일매일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더니, 얘가 하다 하다 별걸 다하고 싶어 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싯다르타처럼 매일 망고나무 아래에서 죽고 그 다음 날 다시 태어난다면, 새로운 사람이니 새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사람들마다 알고 있는 내 이름이 달라지면 글쎄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으로도 재미가 있어서 웃음이 난다. "저는 강물이 흘러가듯 늘 변화하는 사람이라 그래요."라고 말해줘야지 라고 생각하다 문득 사춘기 아들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얘가 나를 닮아 저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