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끼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눈을 열어 나를 보는 것
하루에 거울을 보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아침에 출근 준비할 때 아주 잠깐, 그것도 늘 시간에 쫓겨 바삐 움직이다 보니 대충 화장품을 찍어 바르면서 본다. 일과 중에는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 힐끗 보고, 저녁에 꼼꼼히 클렌징을 할 때도 하얀 거품 사이에 드러나 있는 눈만 응시하며 화장을 닦아낸다. 거울을 보며 생각에 잠기거나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관찰하는 시간은 거의 없는 듯하다. 갑자기 살이 쪄도 잘 모르고 얼굴이 푸석푸석 뀅해져도 잘 인지하지 못하다가 솔직하기 그지없는 막내 동생을 가끔 만나면 뜨악할 정도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피부에 탄력이 없네... 어쩌네 저쩌네 하는 소리를 들으면 충격을 받는다. 나의 얼굴 입장에서는 이런 나의 태도가 어처구니없다고 느낄 것이다. 무심하기 짝이 없으면서 뭘 그렇게 까지 놀라냐고 평소에 하도 쳐다봐주지 않아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하며 비꼬는 소리가 들린다.
큰 아이를 임심 했을 때, 나는 내가 비교적 날씬한 임산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뭐 배만 볼록한 임산부 아니겠어? ㅎㅎ'
임신 8개월이 넘어갈 무렵 막내 동생과 산책을 하다가 제법 통통하신 만삭의 임산부님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동생에게 물었다.
" 나 저 정도로 찌지는 않았지? "
" 음....... 언니가 더 뚱뚱해"
"........ "
"거울 보면 알 텐데......”
"봐... 보는데... 봤어...."
충격이었다. 나는 거울을 볼 때 나의 모습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변신시키는 기상천외한 재능이 있었나 보다.
사실 눈의 시선은 늘 밖이 아닌가?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타자가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세상이 주는 메시지에 눈이 가고 다른 사람의 모습이 늘 내 눈 속에 담겨있다. 나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은 꽤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시간을 내어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나의 모습, 나의 마음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캐나다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수영도 가르치고 스케이트도 가르치기 위해 동네 커뮤니티 센터를 찾았었다. 거기서 만난 한국 엄마가 말했다.
"에고 여기서 속 터져서 애들 못 가르쳐요. 진도가 안 나가요"
정말 그랬다. 그네들은 수영을 배우는 목적이 물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키판을 잡고 음파음파부터 시작하는 한국의 스포츠센터에서의 교육과는 달랐다. 놀면서 아이들이 물과 만난다. 어떻게 하면 코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면서 호흡할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다음 단계로의 진급은 없다. 스케이트는 더 했다. 캐나다 하면 하키, 하키 하면 캐나다 아니던가? 잔뜩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빙상장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보았다. 아이들이 얼음판 위에 누워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은 빙상 위를 기어 다니고 헤엄치듯 돌아다녔다. 그 아이들은 스케이트를 타는 방법보다 미끄러운 빙상 위에서 놀고 있는 즐거운 자신을 먼저 인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마찰이 거의 사라진 빙판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 아닌가...... 빙상은 미끄러운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야 라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얼음판은 미끄러지면 다치는 두려운 공간이 된다. 미끌미끌한 얼음판의 차가운 촉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마구 뒹굴어도 보고 미끄러져도 보면서 지금까지 딛고 살아온 땅과 어떻게 다른지 스케이트화의 모양은 왜 이렇게 생길 수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될 때까지 여유를 갖는다. 아이들마다 빙상을 대하는 마음의 모양이 다르므로 느끼는 것도 적응하는 시간도 다르다. 매뉴얼로 접근하기 전에 물 속에서 또는 얼음판 위에 머무는 자신에 먼저 집중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내 모습이 부족할지라도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본문 중에 주인공이 거울을 보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구샤미는 늘 그렇듯 자신의 서재에 처박혀 낮잠이나 자고 아무 잘못 없는 아내에게 실없는 농담을 건네면서 부인의 심사를 긁고 있었다. 고양이는 구샤미 손에서 "반짝"하는 것을 발견한다. 음 저건 욕실에 있어야 하는 건데 왜 서재에 와 있는 거지? 라며 거울을 보고 있는 구샤미의 모습을 살핀다.
주인의 얼굴에는 곰보가 가득하다. 그것이 머리까지 퍼져있어 머리를 길러 가르마로 최대한 그것을 가리고 있다.
"역시 추레한 얼굴이군"
구샤미는 거울을 바라보며 말한다. 어떻게 하면 곰보자국이 덜 보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빛의 방향을 달리해 보기도 한다. 얼마나 거울과 씨름을 했으면 고양이는 주인이 곰보를 연구하는 것인지 거울과 눈싸움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인이 자기의 본성을 깨닫는 방법으로 거울을 상대로 여러 가지 몸짓을 지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구샤미는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거울을 통해 자신의 치부를 들여다 보고 그것이 눈에 띄지 않을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별도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의 얼굴과 정면으로 대결한다. 기죽지 않고 바라본다. 구샤미는 도시 외곽에서 비주류로 살아가는 사회성 없고 융통성 없는 인물이다. 시류에 편승하여 재빠르게 서양문물을 자신에게 흡수시켜 살아가는 자들과 다르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다 결국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평하게 집에 찾아온 손님과 마주한다.
"대개 인간 연구는 자기를 연구하는 것이다. 천지든 산천이든 일월성신이든 모두 자기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것에서 연구할 대상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인간이 자기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 있다면, 뛰쳐나가자마자 자기는 없어지고 만다. 게다가 자기 연구는 자기 말고는 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누가 해줬으면 싶어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금의 호걸은 다들 제 힘으로 호걸이 되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 저)
나는 계속 부족할 예정이라서
SNS는 실시간으로 타인의 삶을 우리에게 노출시킨다. 나만 빼고 모두 멋진 길을 가는 것만 같다. 나만 그 길을 걸어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도 그 길을 무작정 따라나선다. 길을 가는 방법도, 가서 하는 일도 똑같다. 더 이상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은 없는 것 같다. 나스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그런 삶을 유령의 삶이라 했다. 다른 사람의 설법에,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도리에, 그리고 다섯 수레에 실을 만큼 많은 벌레 먹은 책 속에 자기가 존재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유령이라고......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무시할 만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거울은 나를 보게 하고 나를 생각하게 한다.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본다. 눈을 뜨면 세상이 보였는데 거울은 눈을 뜨고도 나를 볼 수 있게 해 줬다. 물끄러미 바라보니 낯설고 어색하다. ‘나’는 ‘나’랑 가장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 대하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너무 바빠서, 유행을 좇아 가느라 또 다른 사람의 뜻을 따르느라 정작 나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좀 더 성숙한 나를 꿈꾸었고 나의 한계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서 타인이 정해 놓은 삶의 목적을 치열하게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부족한 사람이었고 여전히 부족하고 앞으로도 부족할 예정인데 누군가가 정해놓은 완벽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불완전함을 자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로서 삶을 구현해 나가면 된다. 내가 그려낸 가상의 나의 모습도,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도 아닌 지금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그대로의 나에게 인사하면서 타인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살아가길, 나에게 그리고 그대에게 눈짓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