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다른 얼굴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

by 김보아



혼돈 속 잃어가는 것들,


금년 초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지구 곳곳에 봉쇄조치가 이루어졌었다. 처음에 중국 우한이 그랬다. 우한시의 경계지역에서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을 살려달라고 울며 서 있던 어머니와 어떤 감정적 동요도 없이 그 선을 지키고 있던 군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떠나려 했고 누군가는 또 다른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막아야 했다. 불과 얼마 전 대구지역에 코로나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져나갔을 때 그 지역에 사는 코로나 유증상의 노모가 KTX를 타고 그 당시만 해도 코로나 청정지역이었던 딸네 집으로 이동했고 동선이 공개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대구가 봉쇄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그 지역의 이동을 허락하고 있지 않았다. 그 당시 대구에는 의료진과 시설이 부족해서 집에서 대기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비극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동할 수단이 없었는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는 교통수단으로 그 지역을 벗어났고 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코로나는 더 이상 지구촌 어느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의 상황은 극에 치달았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는 이들 국가에서는 마스크를 쓰냐 쓰지 않느냐의 문제까지 정치와 종교관에 따라 얽히고설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타국에서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기 어려워지자 수많은 재외동포들이 귀국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고 특히 이미 발열 증상이 있는 사람들은 비행기를 탈 수 조차 없었다. 그 무렵 가족과 떨어져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학생이 해열제를 먹어가며 발열 증상을 숨기고 입국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마 역학조사를 통해 그 학생이 탄 비행기뿐만 아니라 동선이 겹치는 모든 사람이 전수조사를 받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기사마다 악플이 달렸다. 그 당시 미국에는 진단키트조차 부족한 실정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내 친구의 아들이 코로나에 걸렸지만 고작 알레르기약을 처방받고 귀가했었다. 내 친구도 결국 아들에게 감염되었는데 호흡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입원이 가능했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일주일을 넘게 사경을 헤매다 호전되었고 병상 부족으로 더 안정이 필요한 상태에서 산소탱크와 함께 퇴원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아직 미성년자인 당신의 아이가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는 머나먼 타지에서 코로나에 걸렸고 해열제와 알레르기약으로 버텨야 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열이 있으니 약을 먹으면서 그곳에서 홀로 버티라고 했을까? 해열제를 먹더라도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했을까?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Image via Google

봉쇄가 예고되자 파리를 떠나는 인파의 행렬이다. 누군가는 그 도시를 떠나고 있고 그 시간 여전히 자신의 집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을까? 그 선택의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탈출하려는 랑베르


소설, 페스트(까뮈 저) 속, 랑베르는 기자다. 그가 취재차 잠시 오랑시에 머물고 있는 중에 그 도시에 페스트가 퍼졌다. 피를 토하고 죽은 쥐들이 하나둘씩 보이다가 하루 팔천 마리가 넘는 쥐가 죽어나가기 시작하고 사망자가 서른 명이 되던 날, 오랑시는 봉쇄되었다. 랑베르는 오랑시에 고립되자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그는 억울했다. 자신은 이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페스트에 걸리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파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가 너무나 보고 싶다. 이곳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자신은 이곳에 퍼진 페스트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므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랑시가 겪고 있는 고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기관을 찾아다니며 오랑시의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어느 날 도청에서 자신의 신상에 관해 자세히 물었다. 신분, 가족상황, 수입, 이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원주소지로 보내질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일 거라고 기대했다. 그는 비로소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가 오랑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페스트의 배경이 된 오랑시, image via goole maps



관념과 실존이라는 어려운 말


랑베르는 오랑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가 의사 리유를 만난다. 랑베르는 의사 리유에게 자신이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데 유리한 서류, 건강진단서 같은 것을 발부해 줄 것을 부탁한다. 리유는 써줄 수도 없지만 써준다고 해도 도시를 탈출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리유는 오히려 랑베르에게 시민 보건대에 자원하여 페스트에 함께 대항하기를 권한다. 랑베르는 한 때 스페인 전쟁에 종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겪으며 느낀 것은 영웅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사랑이라는 동기 없이 인간은 얼마든지 소위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시민 보건대 역시 영웅주의에서 비롯된 관념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그런 행위에 신물이 난다고 했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사랑이며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떤 이상도 제도도 관념도 의미 없다고 말했다. 랑베르에게 리유는 이렇게 답했다.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


신은 관념일까?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오랑시를 점령하자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회를 열고 더욱 믿음에 힘쓰기를 촉구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로부터 왔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일까? 관렴일까? 신은? 관념일까? 신이 관념이라면 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아들을 이곳에 보내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철철 흘리게 했을까? 관념적 회개가 가능하다면 관념적 용서도 가능했을 텐데 예수의 삶은 관념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교회 선생님이 들려주신 예화가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 그 사람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 좀 구해주세요!!!" 간절히 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때 작은 배가 지나가다가 그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하나님이 도와주러 오실 거예요." 그는 거절했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더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따졌다. "왜 제 기도를 듣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얘, 내가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서 너를 살리려 했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니?"




사람


의사 리유는 페스트를 해결할 방법은 성실함이라 했다. 페스트의 저자 알베르 까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이야기한 돌을 굴려 올리는 인간의 모습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리유는 자신이 겪고 있는 페스트의 의미를 "끝없는 패배"로 단정했다. 아무리 들어 올려도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을 굴리는 인간. 페스트와 싸우는 리유의 모습은, 끝없는 패배와 포기하지 않은 인간 모습의 전형이었다. 승리가 보이기 때문에 돌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돌을 굴려야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이다. 사실 리유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오히려 추상적인 이유였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의사가 되고 그가 본 것은 죽음이었다. 죽어가면서 "안 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그가 페스트를 위해 싸우는 이유는 너무나 선명했다. 자신의 눈 앞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을 살려서 무엇을 이루고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페인 전쟁에 종군했던 랑베르가 관념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랑베르의 관념적 행동의 결말은 오히려 영웅주의에 대한 회의였고 페스트라는 또 다른 전쟁에 직면했을 때 그는 비참한 현실을 외면했다. 리유가 말한 성실성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이념과 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굶주린 이웃에게 매일 빵 한 조각을 건네는 사람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상관없이 그 일을 계속하는 것과 같다. 리유가 말한 성실성은 관념이 아닌 사람, 거기에 있었다.


막상 오랑시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랑베르는 도시에 남기로 한다. 랑베르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나는 늘 이 도시와는 남이고 여러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이제 볼 대로 다 보고 나니,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나도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들 모두에게 관련된 것입니다." (페스트 중에서, 알베르 까뮈 저)

오랑시를 빠져나가기 전까지만 보건대에 봉사하기로 했던 랑베르는 막상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때 남기로 결정을 했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왜 떠나려는 자신을 막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랑베르에게 리유는 "이 세상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몸을 돌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만 나 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는 채 거기서 돌아서 있죠."라고 대답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왔을 때, 랑베르는 함께 했던 사람들을 떠나 홀로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페스트는 랑베르에게 인간이 관념이 아님을 가르쳤다. 그가 보건대에서 부딪힌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은 관념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들쑤시고 움직이게 했던 건 영웅주의도 관념도 아닌 "사람"이라는 실존이었다. 사람의 존재는 랑베르로 하여금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일으켰다.


지루하고 끝없는 것처럼 보였던 페스트는 어느 날 그 힘을 잃었다. 저자는 급히 물러가는 페스트가 신경질과 싫증으로 붕괴되는 것 같아 보였으며, 그것 자체에 대한 자제력과 동시에 그의 힘의 바탕이었던 그 수학적이며 위풍당당한 효율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듯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묘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페스트가 너무나 별안간에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는 얼떨떨했다. 행복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일들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랑베르는 모든 일이 일순간에 복구될 것이고, 기쁨은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 닥쳐온 불지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페스트 중에서, 알베르 까뮈 저)




그놈이 다른 얼굴로 다시 온다면,


페스트처럼 언젠가 코로나도 한 순간 물러갈까? 랑베르는 페스트와 싸우며 관념과 사랑을 넘어서는 실존의 무게를 경험했다. 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이다. 그 존재에는 목적도 이유도 필요 없다. 누군가가 살아야 하는 데는 근거가 요구되지 않는다. 사람이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창궐하자, 지금껏 살아오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두려움에 직면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생전 처음 불특정 다수를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서워하는 경험을 했다. 전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미워했다. 그리고 살고자 했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와있는 걸까? 아직도 진행 중인 고통들을 우리는 누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우리는 이만하면 많이 깨달았고 충분히 변했을까? 그래서 만약 언젠가 코로나가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우리도 처음 그놈과 마주했을 때와는 달라진 얼굴로 그놈과 겨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