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저)를 읽고,
어느 왕국에 한 마법사가 나타났는데, 그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물에 묘약을 풀었다. 그 왕국의 백성들은 모두 그 우물물을 마시고 미쳐버렸다. 왕과 그 가족들은 미치지 않았는데 그들을 위한 우물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미쳐버리자 왕은 백성들을 통제하려고 안전과 공중위생을 위한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왕국으로 몰려가 함성을 지르며 왕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절망한 왕은 왕위를 떠나려고 결정을 했다. 그러자 왕비는 왕에게 자신들도 백성들이 마신 우물물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왕과 왕비는 우물물을 마시고 정신 나간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마음을 돌렸고 왕국은 평화로워졌다.(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중에서, 제드카가 베로니카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요약함)
매일 광장을 바라보다
베로니카는 엄마가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가 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으며 살았고 그것이 거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직장과 바(bar), 남자 친구의 집, 자신의 집, 엄마의 집은, 쳇바퀴 돌 듯 자신의 일상을 만들어 온 공간이었다. 그녀는 류블랴나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수도원 건물에서 살았다. 그 광장에는 슬로베니아의 민족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동상은 평생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살았던 집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행복한 순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슬픔과 우울함 속에 서만 살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후 산책길, 류블랴나의 거리, 눈 내리는 광장을 바라보던 그녀의 방의 창가도 그녀에게 소소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죽음을 결심한 걸까? 그녀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엄마가 그려 놓은 그녀의 삶의 그림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 내일과 똑같은 또 그다음 날에 대해서...... 그리고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는 그녀의 삶을 생각하며 그녀는 그것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지가 더 이상 그녀 안에 존재하지 않음을 느꼈다. 류블랴나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매일 오고 가는 광장.... 그 광장을 바라보며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했을 것이다. 저 광장을 오가는 무수한 익명의 무리보다 더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대응하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았고 순응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의 작은 틈으로 침입한, 삶에 대한 자각에 그녀를 지탱하던 면역체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즉 삶의 무의미함, 지루함, 우울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고, 광장 속으로 멀어져 가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생애 첫 자기 결정이 비극적 이게도 자신의 삶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력하고 비참했으나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의지였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다시 어떻게 해 볼만한 힘이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빌레트",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만난 곳
베로니카는 죽음을 원했지만, "빌레트"라는 정신병원에서 다시 깨어났다. 그곳은 그녀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머물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분명한 건 모두가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타인의 기대나 인정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어떤 예의를 차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거나 포장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전혀 없는 공간이었다. 자신의 일상과는 너무나 먼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 세상이 생각하는 가장 비정상적인 곳이 그녀에게 허락한 건, 그저 그녀의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유함이었다. 빌레트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이 정상 아닌가......
빌레트에서 베로니카는 의사로부터 자신이 삼킨 수면제가 심장에 해를 끼쳐, 길어야 일주일 정도밖에는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또다시 그곳에서 수면제를 구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노인의 뺨을 후려 친다. 어차피 일주일이 지나면 죽을 목숨인데 뭐가 중요한가? 미친 사람에게 이 사회는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친 사람도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드디어 그녀가 체면을 버리고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자신"을 깨닫게 된 것이고 자기에 대한 인식은 삶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알지도 못했고 결국에는 무기력감에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가 비로소 자신을 만난 건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장소인 정신병원, 빌레트였다.
"아무도 무엇에 건 습관을 들여서는 안 돼, 에뒤아르. 봐, 난 또다시 태양, 산들, 그리고 삶의 골치 아픈 문제들까지 사랑하기 시작했어. 내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건 나 자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했지. 난 아직도 류블랴나 광장을 보고 싶고, 증오와 사랑, 실망과 근심, 진부한 일상에 속하지만 삶의 독특한 맛을 부여하는 단순하고 덧없는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싶어. 만의 하나라도 언젠가 내가 이곳을 나갈 수 있다면, 난 감히 미친 여자가 될 거야. 모든 사람이 미쳤으니까. 가장 못한 것은 자신이 미쳤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들이 그들에게 명령하는 걸 마냥 반복하며 살아가니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중에서 , 파울로 코엘료 저)
베로니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상의 공간에서 보냈고, 그 시간에 비해 아주 짧은 시간을 정신병원인 빌레트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의미가 있었던 시간, 그녀가 가장 강렬하게 자신의 삶과 마주한 공간은 빌레트였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그녀에게 남는 건 빌레트에서 보낸 아주 찰나와도 같은 시간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속 공간이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 살았던 유일한 그녀의 삶의 공간인 것이다. 그토록 강렬한 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 무의미한 삶의 마지막에서, 마치 히치콕의 영화의 롱테이크(long take) 장면과도 같이 길게 길게 머물렀다. 그 시간들은 순간순간이, 죽었던 세포가 살아나듯 천천히 피어났다. 그녀의 눈길이 머무는 모든 것에, 그녀의 마음이 닿는 작은 것들 하나하나와 교감하며, 천천히 빌레트는 베로니카를 깨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간이 그녀를 이끌어 왔다면 이제부터는 그녀가 시간을 이끌게 된 것이다. 일상의 공간에서 빌레트로의 이동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었다. 공간의 변화는 그녀의 인식을 바꾸고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마법사의 묘약에서 깨어나기를,
수년 전에 밴쿠버에 머물던 시절에,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 있는 누드 비치에 간 적이 있었다. 사실은 그곳이 누드비치(Nude Beach)인지 알고 못하고 내려갔었다. 내 앞에서 해변을 향한 계단을 내려가던 여자가 거의 해변에 다달았을 때쯤 웃옷을 벗기 시작했는데 나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그 여자는 급기야 옷을 모두 벗고 모레 사장으로 달려가 담요를 깔고 누워 내리쬐는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미친 여자구나...'
민망한 나는 차라리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주변 상황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나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옷을 벗고 해변을 거닐거나 태닝을 즐기고 있었다.
굳이 누드비치까지 와서 당당히 옷을 입고 서 있는 내가, 그들에게는 '미친 여자'가 아니었을까?
나의 주변에는 나처럼 우연히 혹은 호기심에 그곳에 가 본 사람은 있지만 누드비치를 스스로 즐긴 사람은 흔치 않았다. 누드비치의 그들은 너무나 자유로와 보였고 그 자유를 통해 뭔가 후련함을 맛보는 듯했는데 우리는 그 즐거움을 나눠 마시지 못했다. 뭐 때문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 속 우리는 모두 정상일까?
'아 다들 내 맘 같지가 않아' 흔히들 말한다. 남이 나와 다르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타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불편한 존재이다. 요는 누가 다수에 속해 있는가 이다. 다수가 정해 놓은 삶의 기준, 규범, 방향에 맞지 않으면 소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살기 위해 모두가 걸어가는 그 길을 아무런 저항 없이 따라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길에서 벗어난 길의 끝에 어떤 것이 있을지 두렵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그럴만한 용기나 배짱이 부족해서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행복한 삶의 기준, 즉 타인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나의 기준이 되어 그것을 향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이유도 여유도 없는지 모른다. 삶이 뻔하다는 이유 죽기로 결심한 베로니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이나 될까? 이미 똑같은 우물물을 나눠 마신 우리는 베로니카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렇다면 베로니카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뭐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최소한 그녀를 설득할 말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삶이 뻔하고 지루한가? 베로니카는그것을 결국 자신이 살아온 삶 속 선택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녀는 사춘기 시절에는 뭔가 선택하기에 아직 때가 이르다고 생각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뭔가 바꾸기에 늦어서 체념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가......? 늦었나......?
과연 무엇이 더 행복할까? 마법의 묘약에서 깨어나지 않고 사는 삶과 묘약에서 깨어난 삶, 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