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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Dec 09. 2019

판테온은 옆모습을 먼저 보여주었다

삶은 시나리오가 없는 것


로마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와 판테온을 향해 길을 나섰다. 몽글몽글 검게 깔린 돌바닥이 펼쳐지자 비로소 내가 서울을 떠나 아주 먼 곳으로 떠나와 있음이 실감이 되었다. 구글맵을 켜고 판테온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대충 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판테온에 도착하기 전 중간 정도 지점에서 나보나 광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로마시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별 것 아닌 출입문, 문고리, 창문의 모양, 건물의 벽면을 수놓은 크고 작은 석조 장식들 하나하나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이어 골목마다 펼쳐지는 작은 상점들은 나의 눈을 사로잡았는데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하고 판매까지 하는 공방 규모의 상점에 들어가 그네들의 세련되고 섬세한 작품들을 구경하다 보니 그 재미가 너무 쏠쏠해서 나보나 광장이고 판테온이고 오간데없었다. 어쩌면 오늘은 이렇게 돌아다니다 끝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며 길을 따라가다 보니 강 건너 성천사성이 보이고 테베레강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왼쪽으로 흘러서 걸었나 보다.


'아, 이 다리를 건너서 왼쪽으로 가면 바로 바티칸이구나'


궁금한 마음에 일단 다리(성천사의 다리)를 건넜으나 바티칸 방문은 다음 날로 미루고 일단은 방향을 틀어 오른쪽으로 강변을 따라 걸었다.  눈앞에는 온갖 기념품을 파는 가판대가 즐비하고 뒤로는 테베레강이 찬란하게 빛을 반사하며 출렁이고 있었다.  그렇게 강변을 따라 걷다가 법원 건물 앞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쭈욱 걸어 돌아 내려오니 나보나 광장이었다. 나보나 광장에서 판테온에 이르는 길에도 역시 골목마다 볼거리 가득한 상점과 음식점이 즐비했다.  또다시 뒷골목 구경에 걸음이 느려졌다. 판테온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때, 나의 왼쪽에 옆모습을 드러낸 웅장한 건물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마치 갑자기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듯 건물을 의식하며 나란히 걷다가 코너를 돌아 건물의 바로 그 얼굴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아마 반대편에서 진입을 했다면 느낄 수 없었던 드라마틱한 경험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세월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나는 정면으로 채 걸어가기도 전에 일단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판테온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    

 그렇게 로마는 언제나 골목길을 따라 나를 인도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다른 시공의 세계로 나를 밀어 넣는 마법을 부렸다.


시간과 영원이 맞닿은 곳


진한 커피 한잔이 다 비어질 때쯤에 몸을 일으켜 신전 안으로 향했다. 나에게 점점 다가오는 그 짙고 깊은 200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감은 검게 퇴색한 기둥을 만지는 나의 손끝을 통과해 전해졌다. 또다시 신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열주들 사이에서 한 동안 서성였다.      

 신전 안으로 발을 디디자, 원형의 신전을 덮고 있는 원형의 돔 그리고 원형의 돔 안에 있는 원형의 천공이 나의 시선을 위로 끌어올렸다.  신전 안에서 바라본 하늘은 신전 밖에서 바라본 하늘이 아닌 듯 보였다.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듯한 그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들의 날갯짓은 마치 천사가 된 신들의 몸짓이 아니였을까? 그 하늘에도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갔다.  

그 옛날 판테온에서는 늘 재물을 태우는 의식이 행하여졌는데 그 열기가 천공을 통해 빠졌나갔고 상승하는 공기의 흐름은 빗물이 들이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천공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닥에는 재물의 피가 흘러나가는 구멍이 뚫려있었다.

 신전 한 켠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단발머리 멋쟁이, 라파엘로의 관이 놓여있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꼭 이곳에 안치되기를 소원했었다고 하니 라파엘로는 죽은 후에라도 천사가 되어 이곳에 머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매년 뽑기 형식으로 사후에 이곳에 안치될 수 있는 사람이 선택되는데 2002년 월드컵 때 이름이 친숙해진 축구선수, 쁘띠도 그 주인공 중에 하나라고 한다.

 땅과 하늘이 이어진 듯한 판테온은 삶과 죽음이 닿아있고 시간과 영원이 맞대고 있는 그 어디쯤의 공간 같았다. 누구나 지나가는 삶, 누구나 들어가야 갈 마지막의 문턱이 그저 삶의 일부인 듯 그 공간은 찬란하고 경이로웠으며 슬픔보다는 환희에 휩싸여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현실은 나를 살아있게 한다


"어떤 움직임 만남, 교제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기계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실수도 감수해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기계적인 되풀이, 지루한 반복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로자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사람은 죽은 것이다"라고 단언한다"(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중에서, 나탈리 크납 저)


판테온까지 가는 동안 나는, 내가 예상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의 즐거움이 좋아서 목적지를 잠시 잊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샛길을 걸었으며 그러했기에 지루하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한 카페의 크라상 한 조각과 에스프레소 한 잔은  미리 계획하고 찾아간 맛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가끔 집시가 다가와 정신을 혼란하게 하기도 하고 같이 간 일행이 셀폰을 소매치기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근처에 잠복해 있던 그야말로 리얼 오리지널 이탈리아 형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여정의 골목골목, 내가 선택한 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면서 걸음을 내디뎠다. 때로는 갈림길에서 선택한 길이 후회스럽기도 해서 먼 길을 되돌아 나오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한 감정과 만나고 이별하면서 나는 새로워질 수 있었다.


죽음도 언젠가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직 저 멀리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 옆"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도 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고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삶의 순간순간은 더욱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내일을 생각하면 기대감보다는 해결해야 할 업무가 떠올라 벌써 마음에 짐이 가득하다. 즐거움보다는 부담과 피곤함이 벌써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을 기대하며, 내일 하루라는 시간의 의미를 하찮게 내버리지는 말아야겠다. 그것이 비록 미미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1, 앤틱가구와 소품으로 가득했던 에어비엔비 숙소, 저 테라스에서 해 질 무렵 와인을 마셨다 (all photos by ©boah)



#2. 숙소 앞 벽면,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벽면들 (all phots by ©boah)



#3, 숙소 근처의 카페, 첫날 아침은 간단히 크라상과 에스프레소 커피로 간단히 해결했다 (all phots by ©boah)

 



#4, 이튿날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서의 아침식사, 오늘은 든든히 먹고 출발! (all phots by ©boah)
숙소 근처 성당의 종소리(©boah)


#5, 성천사다리를 건너편의 성천사궁전, 판테온과는 반대 방향으로 잠시 흘렀다. 강 건너가 궁금하니 일단 직진! 다리를 건너니 왼편으로 바티칸이 보였다. 아쉽지만 오늘은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판테온 방향으로 걸었다. 가면서 만난 거리의 가판대, 테베레강의 풍경들
멀리 바티칸이 보인다(all phots by ©boah)


#6, 잔인한 역사적 사실이 남겨져 있는 나보나 광장, 네로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을 마치 가로등처럼 세워 놓고 머리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7, 나보나 광장에서 다시 판테온을 가는 길  (all phots by ©boah)




#8, 옆모습을 먼저 드러나 판테온,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 지점  (all phots by ©boah)



#9, 판테온의 얼굴과 만나다  (all phots by ©boah)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본 판테온의 얼굴



#10, 마침내 판테온 안으로  (all phots by ©boah)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열주
돔 안에 천공, 또 다른 세상의 하늘처럼 보였다.

 

바닥의 구멍, 이곳으로 재물의 피가 흘러나갔다고 한다

 

 


점선대로가 아닌 내 멋대로 걸어갔던 길, 파란선의 길... 오래 걸렸어도 즐거웠다.  ©b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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