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스 May 16. 2020

Track.52 습기를 머금은 베네치아에서 하루

이탈리아 베네치아 Track. Raining - WINNER


2019. 11. 05 (화)
이탈리아 베네치아 본섬
RAINING - WINNER 



먹구름 뜬 날씨가 참 밉게도, 하늘은 여전히 맑은 날씨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11월이 들어서자 이탈리아는 본격적인 우기가 찾아왔다. 로마의 작렬하는 태양이 이젠 그리울 정도다. 베네치아에 회색빛 하늘에 비가 조금씩 내린다. 비가 내리니 운하의 수면이 더욱 높아지고, 물결은 더욱 찰랑거린다. 흐려진 날씨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은 차분해진다. 쌀쌀한 느낌에 도시가 추워 보이지만 도시는 내색하지 않는다. 동절기로 향하는 지중해의 미항은 오히려 차분하게 본연의 도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가 내리니 본섬을 우산 하나 펼친 채 그저 이곳저곳 돌아보기로 한다. 구불구불 골목들 사이로 보이는 운하와 다리를 건너갈 때, 들리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그저 걷는다. 자칫 한없는 우울감에 빠질 법한 상황에 타닥타닥 우산에 맞으며 생기는 빗소리는 오히려 도시의 운치를 돋우는 BGM이 되었다.




비가 내리니 산마르코 광장에는 보행자 다리가 생겼다. 광장 바닥에 물웅덩이가 생기니 사람들은 나무판자로 임시 보행자 다리를 걷는다. 사람들이 임시 보행자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보니 비친 물웅덩이에는 사람들이 물 위를 걷는 모습처럼 보인다. 물과 함께 사는 베네치아만의 문화를 비 오는 날씨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장화를 신은 꼬마들부터 비 내리는 날씨가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빗질로 고인물을 밀어내는 가게 아저씨까지. 먹구름 뜬 날씨는 오히려 베네치아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바다 내음에 잉크 냄새를 머금은 운하 옆 작은 '아쿠아 알타' 서점 



베네치아의 골목길에서 길을 잃어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걸어보니 ‘Aqua Alta’ 서점이 눈 앞에 나타났다. 비도 잠시 피할 겸 안에 들어간다. 서점에는 곤돌라 모양의 책장이 있었고 그 안에는 읽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쓰인 책들이 가득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를 인지할 때, 그건 언어가 아닌 하나의 그림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문자는 언어로 쓰인 정보가 아닌, 하나의 디자인으로 뇌는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쓰인 텍스트는 예쁜 폰트 디자인으로 보였다. 표지 디자인이 괜찮은 책이 있어서 구매하고 싶었지만, 막상 사면 읽지도 않고, 아니 읽을 수도 없는 예쁜 쓰레기가 될 것이기에 그냥 도로 책장에 두었다.


나는 여행지에 오면 종종 책방을 들르는 편이다. 국내에서는 경주 황리단길에 있는 ‘어서어서 책방’이나 부산 보수동 헌책방거리와 인디고 서원 등을 들렀다. 런던에서는 Notting Hill Bookstore, 파리에서는 Shakespeare and Company 등에 다녀왔다. 그 외에도 평소에 하릴없을 땐 서점에 들러 책들에 둘러싼 공간에서 길을 헤매곤 한다. 서점에서 길을 잃으며 시간을 보내는 건 꽤나 매력적인 활동이다. 책을 읽어보며 평소에 관심 없던 주제에 생각해보기도 하고, 이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보며 추억에 빠지기도 한다. 맘에 드는 문장을 머릿속에 새기거나, 몰랐던 단어를 수집하는 재미도 있으니 말이다. 베네치아의 Aqua Alta 서점에서도 한동안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로 쓰인 책들 사이에서 길을 헤맸다. 책에 보이는 한 이탈리아 단어의 뜻이 무엇일까 맞춰보기도 하고, 레트로풍 표지 디자인에 꽂혀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며, 그리고 예쁜 일러스트가 그려진 엽서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한껏 비가 와서 무거워진 공기에 잉크 냄새가 듬뿍 풍겨와 서점 전체를 가득 채웠다. 







서점에서 나오니 비가 잠시 멈춰 우산을 거둔 뒤 동행과 함께 본섬을 돌아다녔다. 이날의 동행은 중국분이셨는데, 한국에서 4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졸업하신 분이었다. 처음에는 중국분인지 몰랐다. 억양이 조금 차이 날 뿐, 한국 사람처럼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행하면서 서로에게 한국어와 중국어를 조금씩 알려주는 시간도 가졌다. 매우 초급 중국어를 해보았는데, 물론 그분 앞에서는 굼벵이가 주름잡는 수준이었겠지만 매우 잘한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1학년 때 들은 중국어 교양수업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나 보다. 덕분에 함께하는 동행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문득 중국인 동행분이 어떻게 해서 한국인 동행을 구했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동행을 구하는 사이트는 N사의 유럽여행 카페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국인 동행을 구하는데, 오늘의 중국인 동행도 그곳에서 알았다. 내가 조심스레 물어보니 동행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유학하니 한국 포털사이트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고 한다. 물론 중국의 여행커뮤니티에서 여행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한국어 실력을 기르려 한국 동행을 구하면서 여행한다고 답했다. 그녀는 거기에 중국인 여행객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중국사람들은 자유여행이나 배낭여행객이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단체 패키징 관광이 많은 게 현실이다. 단체 패키징으로 다니면 시끄럽고 주요 관광지 위주로 다니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중국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인 듯하다. 내 생각에는 중국어의 특성 때문도 있지만 아직까지 중국사람들의 여행지 매너가 부족한 거 같다."


그녀의 솔직한 답변을 듣고선 그동안 여행 다니며 내가 생각했던 중국 여행자들에 대한 편견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중국 여행자들에 대해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고, 특히 단체 중국 여행객들을 보면 피하기 일쑤였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중국 사람들 중에 여행지 매너가 부족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와 함께 다닌 오늘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중국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시간이었고, 중국사람으로부터 듣는 자국민 여행자에 대한 성찰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결국 나라나 국적을 떠나 사람 by 사람이었고, 어느 나라 사람이던 여행지 매너를 지켜야 하는 걸 깨닫는다.




저녁에 동행분은 베네치아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한다고 했다. 그녀와 산타루치아 역에서 헤어지니 비가 다시 내린다. 접어둔 우산을 다시 펴 비를 막았다. 우산을 씻어 내리는 비는 바닥에 떨어지며 내 신발을 젖는다. 다시 하늘은 무거워지고 습기를 한껏 머금은 공기는 바다의 비릿한 내음을 코끝에 퍼트린다. 숙소로 향하는 길, 수상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밖에는 바다 저편으로 구름 사이로 붉은 노을이 보였다. 여행을 하면서 흔히 노을 맛집이라 불리는 명소에서 아름다운 노을을 눈에 담았지만, 오늘 저녁에 본 흐린 하늘 저편에서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가장 아름다웠다. 공허한 기분이면서도 시원한 알 수 없게 형용하기 힘든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노을이었다. 사진으로는 황혼의 노을을 차마 담을 수 없었다. 그저 눈에 담아둘 뿐이었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는 말해주지 않은 비 오는 베네치아의 하루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Track51. 길 위에서 만난 좋은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