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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더군 Jul 12. 2021

아직 끝나지 않은 학살, 발칸반도 II

#여행의인문#발칸반도#역사




1995년 유고 내전은 클링턴의 재선을 앞둔 미국과 나토의 대규모 폭격으로 중지되었지만 보스니아는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스릅스카 공화국 두개의 국가로 이루워져 있으며,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세명의 대통령에 의해 운영되는 기형적인 국가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에선 2차 대전중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던 우스타샤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 2017년 헤이그 전범 재판소에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음독 자살한 유고 내전의 전범 프랄약을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영웅으로 추모한다. 한편 세르비아인들은 우스타샤에 맞서 싸운 체크니크 군복을 입고 비엔나 거리를 활보했다. 아직 발칸인들의 마음속에서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26년 전 오늘(7/11~ 7/13), 보스니아의 시골 마을 스레브레니차 Srebrenici에선 세르비아인에 의해서 비무장의 보스니아 인들이 공식적으로 8,000명, 비공식적으로 15,000명 이상 학살되었다.


240만 명이 난민이 되었고
200만 명이 자신의 집을 잃었으며
14만 명이 죽었으며
2만 명(비공식적으론 6만 명)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다.

1992-1995 유고 내전












스레브레니차에서 유골을 확인하는 법의 인류학자 윌리암 허그란드 - © Gilles Peress / Magnum Photos



스레브레니차 학살 발굴 현장 - https://izdvojeno.ba/



스레브레니차에서 학살당한 가족들의 시신 찾는 장면 - www.glasistre.hr











학살의 시작


발칸반도 학살의 첫 번째 발단은 종교, 발칸 지역은 종교의 용광로 같은 곳이다. 1500년 전 훈족에게 밀려 나온 슬라브족이 유럽으로 이동하게 되고 남쪽으론 발칸반도 지역까지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발칸반도를 남슬라브라는 뜻으로 유고 슬라비아라고 부르게 된다.


5세기 서로마가 멸망한 공백지대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동서 교회가 서로 주도권을 들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이탈리아랑 가까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지역에선 로마 가톨릭을, 키릴 문자로 기억되는 동방 정교회의 선교사였던 키릴과 메토디우스 대주교는 슬라브족을 전체를 개종시켰다고 하는데, 발칸반도의 동쪽,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상당수의 슬라브족들은 동방 정교회를 믿게 된다.


두 개의 종교 그리고 무역이 발달한 아드리아해와 지금의 에게해, 지중해를 끼고 있는 발칸반도는 유대인들에게도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15세기 신흥 세력인 오스만 터키가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분위기는 바뀌게 된다. 무슬림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슬라브 인들보다 한참 먼저 발칸 지역에 정착했던 알바니아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였고 슬라브인 중 보스니아 인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그때부터 발칸 지역에는 갈등의 씨앗이 뿌려진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국가의 중심이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민족과 국가를 연결시킨 것은 백년전쟁을 겪었던 영국과 프랑스 정도,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대부분은 수백 개의 영 방국 가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에게 민족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을 겪은 프랑스인들의 새로운 황제 나폴레옹은 유럽을 거침없이 정복하며, 프랑스혁명의 정신과 민족주의를 알린다.






나의 투쟁, 히틀러 - 구글 이미지



우스타샤 모자를 쓰고 있는 크로아티아인들 - 구글 이미지





나폴레옹 이후 단일 민족으로만 이루어진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민족주의 파시스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최악이 익히 알려진 세계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히틀러로 "역사란 생존을 위해 인종 간에 벌어지는 갈등"이라며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당위성을 말했다.


2차 대전 이전 히틀러의 고향 오스트리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발칸 반도에도 히틀러와 비슷한 파시스트 정치인 안테 파벨리치 Ante Pavelić 가 있었다. 그는 크로아티아 극우 민족주의자 단체인 우스타 샤를 이끌던 지도자로 당시 발칸반도를 통치하던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을 암살하고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지원으로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통치한다.


우스타샤는 발칸반도에 다수 민족인 세르비아를 가장 큰 적으로 생각했는데, 세르비아인들의 1/3은 죽이고, 1/3은 개종시키고, 1/3은 크로아티아 영토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강령을 정하고 1/3론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40만 명의 세르비아인, 10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였는데, 워낙 학살이 끔찍하고 잔인하게 벌어져, 이후 독일인들이 가스실을  만들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1/3론 중 개종을 시킨다는 부분은 크로아티아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세르비아 여성들을 강간하는 부분도 있어, 발칸반도의 민족들에게 큰 상처를 만드는데, 이후에도 유고 내전(1992~1995) 중 세르비아 군인들이 집단적으로 보스니아 인들을 강간하는 일이 다시 벌어졌다.




전쟁에서 태어난 소녀와 어머니의 이야기 그르바비차 - 구글 이미지



발칸 반도는 무슬림계의 통치와 기독교계 슬라브 인들과의 갈등이 몇 백 년 동안 쌓였고 2차 대전중에는 세르비아 민족을 살해하는 우스타샤의 만행, 이에 대항하며 크로아티아인을 죽이는 세르비아의 체트니크, 독일의 나치군, 요시프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이 섞여서 싸우던 최악의 전쟁터였다.










평화로웠던 발칸반도의 50년



비동맹운동 창설자 : 왼쪽부터 네루(인도), 크와메 은크루마(가나), 나세르(이집트), 수카르노(인도네시아), 요시프 티토(유고).


요시프 티토 - 구글 이미지



난장판이었던 발칸 반도를 "유고 슬라비아(남슬라브족)는 하나"라며 전쟁을 멈추게 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카리스마로 각 민족을 설득한 사람이 유고슬라비아의 종신 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 Josip Broz Tito, 그는 가장 인구가 많은 세르비아계를 유고연방의 중심축으로 만들고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가질수 있게 보장하면서 서로 협조하는 유고 연방을 설립한다.


강력한 지도력과 카리스마로 유명한 요시프 티토는 1961년 제3세계의 지도자들과 미국 소련 어디에도 끼지 않는 비동맹 운동을 주창하고 유고 연맹을 이끈다. 종신 독재와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가 살아있었을때, 유고 연방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민족과 종교를 신경 쓰지 않고 이슬람계와 유대인이 결혼하고, 정교회인과 가톨릭 신자가 결혼하였다. 사회주의 유고 연방에는 자유가 있었고 민족의 통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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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ther we want to admit it or not, at least our freedom was assured back then [in former Yugoslavia]. (Interview 1)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선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습니다.

Don’t Talk About the Elephant: Silence and Ethnic Boundaries in Postwar Bosnia-Herzegovina - Ana Mijić, 2018, 코끼리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 후 침묵과 민족의 경계에 관하여 - 아나 미이치



유고 연방 자체가 엘리자베스 여왕부터 스탈린까지 다양한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눈 요시프 티토 개인의 능력에 크게 의지하였는데, 그는 제대로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티토가 죽은 1980년 이후 점점 유고연방은 분열의 조짐이 있었고, 십 년이 지나지 않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같은 세르비아의 정치인들이 크로아티아인들과 알바니아인들이 우리를 다시 학살할 것이라며 대중을 선동한다. 그리고 1991년 연방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부터 유고 내전은 시작된다.




3부로 이어집니다.










크로아티아 파그섬 - 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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