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인문 #발칸반도 #역사
오늘은 1991년 6월 25일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부터 시작된 유고 내전의 시작부터 보스니아 내전의 주요 전범이자 스릅스카 괴뢰국의 대통령이었던 라도반 카라지치가 잠적한 1996년 3월 1일까지 벌어진 유고 내전을 전쟁에 관련된 주요 인물들과 벌어진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민족과 종교의 용광로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현대 최악의 전쟁, 유고 내전에 관한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슬로베니아는 2004년, 크로아티아는 2013년에 EU에 가입하였고 나머지 국가들도 가입 준비 중이다.
사회적 현상을 이야기할 때 선악을 나눠서 판단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특히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남 슬라브족이 종교로 분열되면서 민족이 분리된 유고 지역은 각 민족의 이익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고, 2차 대전 직전 크로아티아 괴뢰국이 주도한 인종 학살과 크로아티아 외의 민족을 2등 시민 취급하는 정책으로 인해 발칸반도의 민족들은 격렬하게 서로 증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르티잔을 이끌었던 카리스마적 독재자였던 티토는 유고 연방의 6개국을 하나의 형제국가로 끌어갔다 하지만 티토가 죽자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로 혼란에 빠지고 1989년 소련의 붕괴로 인하여 유고연방은 더욱더 혼란과 공포에 빠졌다.
역사적으로 불안한 시기에는 "저기에 우리의 적이 있다고 외치는" 위험한 정치인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https://brunch.co.kr/@boarderslife/22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 Slobodan Milošević, 1941 - 2006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는 전범이자 유고 내전의 원흉이라고 불리는 독재자, 1984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공산당 동맹 당수로 선출된 후 다수 알바니아인, 세르비아인이 소수 거주하던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의 집회를 강력하게 진압 후 인기를 얻어 1989년에 유고연방 세르비아의 대통령으로 당선, 연방국과 통합을 강조한 유고슬라비아 헌법을 부정, 유고 연방을 세르비아 중심의 연방으로 이끌어간다. 이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직 간접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유고 내전을 시작하고 조종하였으며, 인종 학살 및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가장 피해가 컸던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을 지원, 라도반 카라지치의 학살에 동조했다.
이후 1998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통합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주화 운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다. 1998 ~ 1999 코소보의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 간에 벌어진 코소보 전쟁을 직접 지원하였고, 2000년에 유고 연방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로 실각, 2001년 부패, 권력남용, 횡령 행위로 체포, 네덜란드 헤이그의 전범 재판소로 이송되었고, 2006년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였다.
미라냐 마르코비치 / Mirjana Marković, 1942 ~ 2019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부인이자 정치적인 동반자였던 미라냐 마르코비치는 붉은 마녀, 발칸의 레이디 멕베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밀로세비치를 만나고 20세 초반에 결혼했다. 그녀는 사회학 박사로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꽤 많은 사람들은 밀로세비치는 정치적 성향이 거의 없었으며, 그녀가 그를 조종했다고 한다. 특히 1999년 언론인, 2000년 벌어진 슬로보단의 정치 라이벌이었던 이반 스탐볼리치 암살 사건에 그녀가 관계되었다는것은 유력한 가설이다.
그녀는 밀로세비치가 이끌던 사회주의당의 연정관계였던 신공산주의자당의 당수였으며, 세르비아 주간지 두가에 정치 칼럼을 기고하며 남편의 학살을 도왔다. 공산주의자로 학문적인 명성이 높았던 그녀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이었으며 2019년 모스크바에서 일생을 마쳤다.
보더 say 1999년 코보소 전쟁
코소보의 수도인 프리즈렌은 중세 세르비아의 수도이자 동방 정교회에서 세르비아 정교회를 인정받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이다. 프리즈렌은 세르비아 사람들의 마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15세기 오스만 터키에 의하여 중세 세르비아는 멸망당했고 이후 이슬람계 알바니아인들과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1913년 발칸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세르비아의 영토로 돌아왔지만 요시프 티토 치하의 유고연방에서는 자치주로 인정받게되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코소보는 되찾아야 영토였다.
1990년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는 코소보 다수 민족인 알바니아인들을 탄압하고 인종학살을 저지른다. 1995년 유고 내전이 패전으로 끝나자, 독립을 원하는 알바니아계 코소보인들은 세르비아와 소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실패했고 1999년 세르비아의 조직적인 인종 학살이 세계로 알려지며 결국 나토가 개입되었고 전쟁은 끝나게 된다. 현재 코소보는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세르비아에서만큼은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라도반 카라지치 / Radovan Karadžić, 1945~
보스니아 헤르체고바를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중 한 명, 카라지치는 1989년 유고연방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바에서 세르비아계 정당을 설립한다 그는 1991년 보스니아 의회에서 유고연방에서의 분리 독립이 안건으로 올라오자, 의회 진행 중 공개적으로 이슬람계 보슈나크인들에게 학살이 벌어질 거라는 협박 발언을 하였다. 1992년 결국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바 내부의 세르비아계(약 40%)를 모아 1993년 4월 스릅스카 공화국을 설립을 결정, 초대 대통령이 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바는 지옥이 될 것이며,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이슬람계는 방어를 할 수 없을 것이고 학살당해서 사라질 것이다. - 라도반 카라지치 1991 / 10 / 14
당시 보스니아의 대통령이었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는 세르비아인을 제외한 어떠한 민족도 유고 슬라비아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너희가 무슬림을 공격해도 무슬림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3월 보스니아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유고 연방군은 보스니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는 비공식적으로 스릅스카 공화국에 군대와 무기를 공급하였고, 4월 스릅스카 공화국이 선포되자 각지에서 전쟁이 시작된다.
보스니아의 원래 전체 인구는 450만 명 정도였지만 전쟁 후 380만 명으로 감소했다. 전쟁 중 약 220만 명의 난민과 1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 6만 명에 달하는 조직적인 강간 피해자가 발생했다. 전쟁은 대부분 군사력이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이슬람계가 주축인 보슈나크인을 학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크로아티아계로 인한 전쟁 피해도 확인되는데, 2017년 헤이그 전범 법정에서 판결에 불복, 음독자살한 슬로보단 프라 약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이었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스릅스카 괴뢰 공화국의 수반으로서 수많은 전쟁 범죄와 인종 학살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으로 사라예보 포위(1992 ~ 1996년), 모스타르 공략전(1992~1994)을 비롯하여, 나토와 미국이 유고 내전에 개입하게 된 계기인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1995)년까지 다양한 범죄를 라트코 믈라비치 장군과 같이 저질렀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자 카라지치는 1996년 3월 대통령을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잠적한다. 이후 여러 나라를 숨어 다니다가 1999년 세르비아에 베오그라드에서 신분을 숨기고 의사생활을 하였다. 그를 비호하는 세르비아 협조자들 때문에 추적이 어려웠으나 결국 2008년 체포되었으며 2016년 헤이그 전범 재판소에서 만삼 천명에 달하는 사라예보 포위전의 사상자. 스레브레니차에서 민간인 팔 천명 살해에 관한 죄목으로 1심에서 40년 형을 받게 되었고 2019년 항소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 감옥 수감되어 있다.
보더 say 사라예보 포위와 모스타르 포위전
1425일 동안 벌어진 20세기 최장기 포위전,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만삼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분지 지형인 사라예보의 산 위를 차지하고 이동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저격과, 폭격, 미사일, 고사포를 사용하여 도시를 공격했다. 화력이 약했던 보스니아군은 대응할 수 없었고, 4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약 만삼 천명의 보스니아인은 살해당했으며, 사람들은 사라예보 공항 아래를 파서 만든 희망의 동굴을 통해 유엔의 보급을 받으며, 어려운 시간을 버텨냈다.
모스타르의 경우도 비슷하다 사라예보와 마찬가지로 분지 지형에 위치한 모스타르는 전쟁이 시작되자 언덕 위를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민병대가 장악했지만 모스타르를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차지해야 한다는 크로아티아의 군사지도자들에 의해 전쟁이 격화되었다. 그러면서 아군과 적군을 가르기 어려운 혼전 양상에 들어갔고, 전쟁이 격화되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다리 등 수많은 문화제와 모스타르에 거주하던 보스니아인들이 학살당했다.
한때 온라인에서 이슈가 되었던 보스니아 생존기의 배경이 모스타르 인근으로 알려져 있다.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197631
보더 say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보스니아 헤르체고바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스레브레니차 Srebrenica는 인구 2천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고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보슈나크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전쟁 중 스레브레니차가 위치한 동부 지역은 보슈나크인들의 인구가 많았지만 군사적으로는 약자였는데, 세르비아계들은 러시아에서 무기 지원을 받고, 서구에서 무기 지원을 받는 크로아티아계는 세르비아계와 짜고 보슈나크인들을 학살하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1993년 보스니아 정부군 28사단과 스레브레니차 마을은 세르비아계에게 포위, 보급을 차단당한다, 이에 유엔 안보리는 스레브레니차 마을을 중심으로 하나의 시정도의 넓이를 안전구역을 지정하였고. 인근의 보슈나크인들은 전쟁을 피해 스레브레니차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민간인의 숫자는 50000명이 넘었다. 당시 안전구역을 담당했던 캐나다군은 150명으로 넓은 지역을 방어하긴 어려웠고 소규모 전쟁이 계속 이어지자 유엔은 9월 네덜란드군 600명을 교체 파병하고 스레브레니차 지역을 보호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1995년 7월 6일, 종전의 압박이 커져가면서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은 영토를 정리하기 위해 보슈나크인을 다른 지역으로 내몰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을 제압 후 포로로 삼고 유엔의 공중지원을 포로를 살해하겠다는 협박으로 막는다.
50000명이 넘는 보슈나크인들과 28사단 병력들은 라트코 믈라비치가 이끄는 스릅스카 공화국의 병력을 피해 도주하였지만 미처 피난하지 못한 약 만여 명의 민간인들은 스릅스카 군인들에 의해 3일간에 걸쳐 학살당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당했으며, 공식적으로는 8372명, 비공식적으로는 25000 ~ 3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고 정확한 숫자는 집계되지 않는다.
네덜란드군은 방어에 실패하였고 영내로 피난 온 보슈나크인 민간인 350명을 스릅스카 공화국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2002년 빔 콕 네덜란드 총리는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에 네덜란드 정부와 유엔이 공동책임이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내각을 총 사퇴한다.
아직도 스레브레니차 학살사건에 대한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프라뇨 투지만 / Franjo Tuđman, 1922 ~ 1999
크로아티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초대 대통령, 그는 2차 대전 때 요시프 티토가 이끌던 파르티잔의 간부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 주축국을 상대로 싸우던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1960년대 후반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꿈꾸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운동인 크로아티아의 봄을 이끌었으며 투옥되었다. 1989년에는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 정당을 설립, 1990년 크로아티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었고 1999년 사망하기 전까지 대통령직을 맡았다.
민족주의자이자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비판받지만, 유고연방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와 더불어 유고연방의 분열을 이끈 사람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많지만 유고 내전의 종식을 알린 데이턴 회담을 이끌고 세르비아에 직접 방문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국교를 정상화시킨 부분도 있다.
보더 say 유고 내전에서의 크로아티아.
보통 유고 내전사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판단되는 일이 대부분인데, 실제 크로아티아는 당하는 입장만은 아니었다. 크로아티아는 유고 내전 중 현재의 국경선을 어느 정도 확보하자 보스니아에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자극하여 영토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하였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모스타르를 차지하기 위해 약 2년간 전쟁에 참여하였고 인종학살을 저질렀다. 유고 내전 후 세르비아 인들이 가장 화를 내는 부분은 발칸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인종 학살을 시작한 것은 2차 대전중의 크로아티아인이었고, 유고 내전 중에도 인종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서방세계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는 유고 내전의 피해자로만 알려지고 있다.
요제 푸치니크 / Jože Pučnik, 1932 ~ 2003
슬로베니아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제 푸치니크는 원래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정치학자이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요시프 티토의 공산 체제를 반대함으로 투옥당했고 풀려 난 후 정부의 방해로 구직이 불가능해지자 독일 함부르크로 망명한다. 역시 정부의 방해로 류블랴나 대학에서 학적부를 제공하지 않자 다시 함부르크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한다.
1980년부터 그는 다시 슬로베니아의 잡지에 기고를 시작한다. 그가 쓴 글은 민주화와 정치 다원화에 관한글이었는데, 슬로베니아가 공산 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특히 슬로베니아는 유고연방 내부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되었던 나라로 인구 200만의 소국이었지만 유고연방의 총생산(GDP)의 30% 이상을 차지했던 부국으로 경제적인 불만이 있었고 완벽한 독립국이 되길 원했다.
1989년 요제 푸치니크는 다시 슬로베니아로 돌아오고 공산당에 대항해 만들어진 슬로베니아 민주 야당의 대표가 되어 투표를 승리로 이끌고 부통령으로 2년간 재임한다. 그동안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다. 1996년 그는 정계를 은퇴하였고 2003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2004년 슬로베니아는 유고연방 출신의 국가 중에서 가장 빠르게 EU에 가입하였는데, EU 국가 중에서도 가장 경제와 제도가 안정된 국가로 분류돼 EU의 우등생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보더 say 10일 전쟁
슬로베니아는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한다.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막으려는 유고연방군이 투입되었으나 전쟁은 10일 만에 빠르게 끝이 난다. 치밀하게 미리 준비했고 지리적으로 유리했던 슬로베니아 군인들에게 유고 연방군은 패배하였고, 서방의 외교적 압력과 지리적으로 더 중요한 크로아티아와의 전쟁 때문에 연방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은 유고연방에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에, 빠르게 휴전하게 된다. 유고연방군은 44명 사망, 146명 부상, 4천 명의 포로, 슬로베니아군은 19명 사망, 부상자는 182명, 슬로베니아는 EU에 가입 후 징병제를 폐지하고 전문 군인으로 약 7천 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Alija Izetbegović, 1925 ~ 2003
보스니아 헤르체고바의 대통령으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을 맡은 정치인이자 이슬람 철학가이자 작가였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는 92년 세르비아계에 의한 납치, 대통령궁에서 EU의 중재자와 회의 중 포탄 피격 등 파란만장한 임기를 보낸 가장 어려운 시기에 보스니아의 대통령을 맡은 인물이다.
학자였던 그는 1970년 이슬람 선언이란 논문으로 이슬람 혁명을 주장했고, 유고 연방 정부에서는 그의 논문을 금지하며 그는 이슬람계 정치인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자신의 논문은 가상이며, 보스니아에 적용되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논문에서는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을 가장 이상적인 혁명으로 다루어 보스니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다. 결국 그는 법정에 서고 1983년 14년 형을 선고받는다. 후에 12년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에는 유고 연방의 정치가 혼란스러워지면서 5년 만인 1988년에 사면되었다.
당시 보스니아는 인종이 복잡하여 다민족 순환 대통령제를 선택하였는데, 크로아티아인 2명, 세르비아인 2명, 보스니아인 2명, 유고슬라비아인 1명이 돌아가며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는 아주 특이한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1990년 1년 동안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으나 보스니아 내부의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전쟁을 벌리면서 단독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한다. 1992년 2월에는 국민 투표를 실시, 결국 보스니아는 유고연방에서의 독립을 선언하는데, 그 후 그는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포위된 사라예보에 갇혀 살게 된다.
1995년 11월 데이턴 평화협정으로 전쟁이 종전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바(BIH)는 영토 안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바 연방(FBIH)과 스릅스카 공화국(RS)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다. 복잡한 인구 구성과 나토와 미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이 급하게 종전되면서 벌어진 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바 내부에는 아직 분열의 뿌리가 남아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바(BIH)의 대통령으로 다른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대통렬들과 순환 통치하였는데, 1996 ~ 1998, 2000년 2월 ~ 2000년 10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통령직을 수행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 후 2003년에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보더 Say 복잡한 보스니아의 정부 구성
보스니아 헤르체고바(BIH)는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계의 연합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바 연방(FBIH), 세르비아계의 스릅스카 공화국(RS)으로 이루어진 기형적인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다. BIH는 각 민족 3명의 대통령이 8개월 단위로 순환 집권하며, 행정부와 양원제 국회를 가지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바 연방(FBIH)은 대통령 한 명과 서로 다른 민족의 부통령 두 명, 행정부는 내각제 총리가 이끈다. 양원제의 의회와 사법부를 가지고 있으며, 10개 연방의 합일체로 이루어져있다. 스릅스카 공화국은 의원 내각제 국가로 대통령 한 명과 서로 다른 민족의 부통령 두 명, 행정부는 내각제 총리가 이끌며, 단일 의회와 사법부, 62개의 지방자치 정부로 이루어져있다.
4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