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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Oct 19. 2016

덕후를 내버려둬

스펙: 덕후입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 ‘페이트짱’이 그려진 쿠션을 소중히 안고 다니던 남자를 기억한다. <화성인 바이러스>는 그를 오덕후와 오덕후가 합쳐진 ‘십덕후’라고 소개했다. 방송에서 그는 페이트짱 쿠션과 함께 놀이 기구를 타고, 식사도 2인분을 시켰다. “왜 사랑을 실제 사람하고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말했다. 반응이 꽤 셌다.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좀 무섭다고 했으며 어떤 블로거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불쌍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이것이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오덕’, ‘덕후’의 이미지다.

 

지금은 어떤가. ‘덕후’라는 말은 그새 꽤 부담 없는 단어가 됐다. 사용 범위도 넓어졌다. 어떤 분야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물론, 호감 있는 분야에 대해 스스로 덕후라고 칭하는 일이 많아졌다. 화장품을 좋아하면 코덕(코스메틱+덕후), 역사를 좋아하면 역덕, 책을 좋아하면 책덕…. 특정 문화를 벗어나 어떤 단어 뒤에도 착 달라붙는,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된 것이다.

 

‘덕후’란 말이 괄시받지 않는 세상, 얼핏 세상이 꽤 좋아진 거 아닌가 싶다. 그러나 모든 남용은 필연적으로 오용을 부른다. 원래 덕후가 무언가를 미친 듯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 덕후의 방점은 뭔가를 좋아해서 ‘잘하는’ 혹은 ‘해박한’ 것에 찍힌다.


MBC 예능 프로그램 <능력자들>은 몇 단계에 걸쳐 ‘~덕후’라는 사람들의 능력을 평가한다. 사극 덕후에겐 대사와 배우의 목소리만 듣고 어떤 작품인지 알아맞히기, 냉면 덕후에겐 육수 맛으로 가게 이름 맞히기 같은 미션을 던져준다. 그리고 방송에 나온 대부분의 덕후들은 그 불가능할 것 같은 미션을 가뿐히 통과한다.얏빠리 덕후답게! 아쉽게 마지막 단계에서 떨어진 덕후들은 덕력 미달이라는 도장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 한 사내를 ‘십덕후’라 부르며 그의 취향이 얼마나 특이하고 이상한지 와서 좀 보라고 확성기를 들던 방송은, 이제 전문가도 모를 디테일을 알아맞히는 사람에게 대단한 덕후라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이것이 방송이 반영하고 있는 대중의 시선이다.

 


 

‘얼마나 잘 아는가’로 덕력을 검증하는 시대에,덕후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한다는 본연의 미덕 대신 생산성과 결부된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그것을 즐기며 잘하기까지 하는 새로운 인재상으로 쓰이는 것이다. 기업에선 ‘적극적이고 유능한 사람’이란 말 대신 ‘덕후’라는 표현으로 채용 공고를 재치 있게 완성한다. 사회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덕후로 포장된다.

 

그들은 어떤 일에 미쳤고,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시련에도 그 일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고. 그러니 너희도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짐짓 멋져 보이는 이 인과관계에는 우리가 질리게 들었던 자기계발서의 슬로건이 녹아 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나는 이것이 매우 기만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깨닫기도 어렵고, 그것을 삶으로 실현하기엔 더욱 어려운 20대에게 특히 그렇다. 스물 몇 살을 먹고 갑자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뭘까’ 혼란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즐겼을 때 환영받았던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몰래몰래 펴 본 만화책은 늘 선생님에게 압수당했고, 주말에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영상을 보고 있자면 속상해하는 아빠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법은 문제집에 코를 박고 열심히 연필을 놀리는 것이었다. 공부 외의 흥미는 거의 억압당했다.

 

아, 글 쓰는 것 빼고. 그건 내게 상장을 주고, 생활기록부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생산적인 취미였으므로 드물게 귀빈 대접을 받았다. 그때부터 벌써 그랬다. 잘해야, 쓸모가 있어야 좋아하는 것이 용인되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누구는 우주 비행사, 누구는 대통령, 선생님, 외교관…. 그러나 다채로웠던 꿈들은 교육과정이 거듭될수록 가지치기를 당하며 비슷해졌다. 학교 성적이 안 좋다는 이유로 그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꺾여버리기도 했고, 남들과 다르게 살면 인생이 힘들어진다는 논리로 수정되기도 했다.

 

문학이 좋아서 국문과에 가겠다는 내게 담임선생님은 “국문과는 취업이 안 되니까 국어교육과를 쓰라”고 하셨다. 고집을 부려 모든 원서를 국문과로 써서 입학했지만, 학과 선배들이 가장 많이 택하는 진로는 공무원이었다. 나 역시 한동안 ‘문송합니다’ 자조하며 토익 시험을 보러 다녔다. 비단 나뿐이겠는가.

 

광고 기획자를 꿈꾸던 친구는 2년간 뚝심 있게 원하는 몇몇 회사에만 지원했지만, 결국 영업과 매장 관리 등 공고가 뜨는 대부분의 직무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친구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분야를 오랜 시간 흠모해왔던 척 쓰는 게 가장 어렵다고 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얼마든지 길게 쓸 수 있었지만, 좋아한다고 그 일을 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괴리가 발생한다. 기업이 꿈꾸는 덕후는 흥미와 결과로 이루어진다. 노력은 재미라는 강렬한 동기의 힘으로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일 뿐. 사실은 이력서에 더해지는 한 줄 한 줄 자체가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바라는 삶은커녕 2순위, 3순위의 삶을 살기 위해서도 엄청난 인내와 괴로움이 요구되는데 말이다.

 

좋아하니까 자연스레 눈에 띄는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는 ‘덕업일치’ 스토리의 범람 속에서 평범한 구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소설’을 쓰는 것뿐이다. 어릴 때부터 이 분야에 흥미가 있었다고, 내가 한 모든 경험이 사실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그러니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그순간 ‘덕후’는 본래의 의미도, 색깔도 모두 다 잃어버린다. 그것은 그냥 네이밍만 다른 기존의 인재상일 뿐이다.


 



정말 덕후가 가득한 세상을 원한다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경험과 능력’이란 말을 트렌디한 단어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잘 아느냐, 혹은 하느냐’로 덕후를 검증하는 것도 아니다.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도록 그냥 두는 것이다.

 

취향을 존중하면서. 다양한 흥미와 꿈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걸러내지 않고, 그래서 이 세상에 이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보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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