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전셋값을 올리려고 하는데. 응, 천만원.
“여보세요? 응, 나 집주인인데. 12월 초순에 계약 끝나죠?
이번에 우리가 전세 값을 좀 올리려고 하는데. 응, 천만원.”
이렇게 2년 만의 부동산 투어가 시작됐다. 재력이 없으면 발품이라도 팔아야 조금이나마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3주 전부터 토요일마다 부동산에 출석하고 있다.
하루 종일 여러 부동산에 들락거린 탓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중개사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돈과 원하는 집의 조건을 합리적으로 절충해 괜찮은 집을 소개시켜준 고마운 분들도 있었고,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전자에 비해 후자가 훠얼씬 많았다. 오늘은 나의 부동산 투어를 분노로 이끈 중개사 유형에 대해 고찰해보겠다.
case 1. 아이고, 내가 매물을 잘못 올렸네?
집과 대중교통의 거리를 (대폭) 축소해 말하는 건 애교다. 지도 어플에 버젓이 ‘15분’이라고 뜨는데 해맑은 표정으로 ‘7분’이라고 우기는 걸 보고 있으면 "날개 달린 신발 있으신가봐요?" 묻고 싶어지지만, 장사하는 데 MSG를 안 칠 수 있나. 그냥 마음 편히 ‘곱하기 2’ 하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가격이나 집의 컨디션 같은 민감한 문제를 어영부영 말로 뭉개려고 하면 곤란해진다. 분명 보증금 2000에 월세 70이래서 그렇게 알고 집을 봤는데, 집이 괜찮다고 하자 갑자기 “아, 내가 착각했네. 4000에 70이었네!”라고 하질 않나. 집 컨디션이 매우 좋아 보여서 먼 동네까지 찾아갔는데 사진과 딴판인 집을 보여주질 않나.
이 집은 어플에서 본 집이 아니지 않느냐고 했더니 “내가 다른 사진을 올렸구나…”라며 말을 흐릴 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허위 매물! 경험치가 +1 상승하였습니다.
case 2. 빨리 계약해~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이런 유형은 매물을 보러 가기 전부터 “이 집만 한 집이 없다”고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것이 특징이다. 가는 길에도 당장 계약하라며, 누구나 보면 좋아할 집이라고 끊임없이 어필한다. 그 의견에 나도 동의하면 모두가 해피엔딩이겠으나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표정이 더욱 다급해지면서 방언이 터지기 시작.
이때가 가장 기분 상할 수 있는 타이밍인데, 이 집이 얼마나 귀한 매물인지 강조하기 위해 나를 후려치기 때문이다. 이 정도 가격에 이런 집 없다, 젊은 아가씨가 뭘 그렇게 따지냐는 둥(네?), 이 동네 다 돌아봐도 이만한 집 못 구한다는 악담까지. 그렇게 내 정신을 너덜하게 만든 중개사 한 분은 낮에도 어두컴컴했던 그 집을 나서며 덧붙이셨다. “여기가 내 아는 동생네 집이야~ 지금 가서 계약해요. 응?”
case 3. 돈도 없는 천한 것이!
가장 짧고도 임팩트 있는 케이스였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좋아하는 동네에 살고 싶어서 망원동과 합정의 부동산을 몇 군데 돌았다. 집을 보고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합정역 쪽으로 넘어갔다. 지하철역 근처에 부동산이 하나 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 원하는 가격의 매물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의 행색을 동서남북 위아래 좌우로 스캔한 아저씨는 “없어요” 시크하게 대답하고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앗, 차가워. 눈빛으로 침을 맞은 기분이야. 그럼 이쪽 시세는 보통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딱 세 마디였다. “비싸요.” 비.싸.요. 비싸서 너넨 턱도 없으니까 꺼져, 거지들아!
그날, 내 귀에는 누군가 우퍼 스피커를 설치해놓은 것처럼 ‘비싸요’가 한없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