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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ebibu Nov 23. 2024

20대 후기

30대의 초입에서

서른이 됐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다. 최승자 시인이 그랬다.


지난 10년을 어떻게 살았던가? 나의 쓸모를 세상에 증명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썼고, 아름답기 위해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여러 벌 입고 벗었다.


광활하고 낯선 세계, 모두 동일하게 던져졌지만 어떤 이들은 더 오래 낯을 가린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기까지 불안을 친구 삼는다. (하이데거는 세계와 존재의 근거를 알 수 없을 때 느끼는 본질적인 동요를 ‘불안’이라고 정의한다)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면, 내가 살아야 할 시대가 아니라면, 내가 믿고 싶은 진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닿고 싶은 아름다움을 찾아 방황한 10년이었다.




여자의 생애

"시집 잘 가겠다." 내 전공이 미술이라는 걸 들은 남자 선배가 신입생이었던 내게 건넨 ‘칭찬’이다. 지금 들으면 경악할 발언인데 스무 살의 나는 벙쪄서 대화를 넘겨버렸다. 그 후 더 한 말도, 덜 한 말도 들으며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나로 올곳이 서기 위해 투쟁해 오니 세상도 미약하게나마 변해왔다. 하지만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는 망언을 듣고 큰 탓인가. 서른이 된 지금도 나이 드는 몸이 종종 낯설다. 난자 냉동을 말하는 친구들이 늘었고 반대로 엄마가 된 친구도 생겼다. 미국은 내 자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냐 없냐로 시끌시끌하다. 나는 외면하고 있던 노화에 대한 혐오를 들여다보았다.


별 수 있나.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그런데 막상 살고 보니 스물넷의 나보단 지금의 내가 더 아름다워 보인다(주관적. 반박 시 네 말 맞음). 되돌아보면 스물넷의 나는 당돌하고 자유로웠지만 불안했고 스스로에게 불친절했다. 나는 인상이 순하고 착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다 실패하면 스스로를 꾸짖었다. 여자가 나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내가 쫓던 이상향이 왜곡된 욕심인 걸 직시한 후에는 뻔뻔하게 내 맘대로 살고 있다. 내가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꽃도 아닌, 그냥 사람이라는 당연한 진리와 함께.


최근에 누가 ‘추구미‘를 물었을 때 읊었던 이름은 다 서른을 훌쩍 넘긴 여성들이었다. 인생에 짬빠가 쌓인 여자들. 욕망에 진실하고 냉소를 품으면서도 온유한 여자들. 그들은 뭐가 부질없는지 알고 그럼에도 친절할 줄 안다. 삶에 적당한 경제력과 투지를 지녔다. 그 단단한 내실이 주름 없는 피부보다 귀하다. 풍파와 부조리를 부단히 견디면​ 생기는 맷집인가 싶어 아주 맘 편히 동경하진 못하겠다. 작년엔 추구미 목록에 한강 작가가 추가되었다.


최근엔 가까운 어른인 아이유의 말이 유독 와닿았다.

20대에 처음으로 직접 프로듀싱한 앨범 'CHAT-SHIRE'에서 나는 내 나이를 한 떨기 꽃으로 비유했다.
화려한 꽃이든 잔꽃이든. 그때는 내가 때 되면 만개할 꽃이라고 믿었다.

세상 모두가 꽃이 될 이유도, 꽃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30대의 나는 하늘에 홀홀히 나부끼는 홀씨로 살고자 한다. 지치지 않는 쇼핑객처럼 목적지 없이 휘적휘적 구경하고 떠돌며, 내 세상 곳곳에 진열된 다양한 선택지들을 카트에 넣고 싶다.

예쁘고 착하고 모범이 되며 실력까지 훌륭해야 하는 과분한 과업을 치르고 있는 대중가수의 선언이어서 더 후련하다. 이렇게 먼저 헤매본 여자 어른들의 행보를 따라 밟으며 삶을 긍정해 본다. 그래, 서른에도 부지런히 욕망하고 모험해 보자. 더 제대로 길 잃고 돌아가 버리자. 섣불리 뿌리내리지 않고 훨훨 떠도는 홀씨처럼. 마르크 오제가 말하길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이는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가장 주체적인 주인공을 보여준 2019년작 '작은 아씨들' 중,  첫 책을 출판하고 환희에 차 달리는 조. 출처: Columbia Pictures.




일의 기쁨과 슬픔

20대의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를 벌게 되었다는 점. 하지만 내 밥 내가 벌어먹는다는 뿌듯함도 잠시, 자아실현을 일에서 찾다 세게 두들겨 맞았다. 비로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명감에 과몰입한 결과다. 밀레니얼은 그 전후 세대와 다르게 자존감이 높고 자의식 과잉인 경우가 많다더라. 내가 왜 일을 통해 세상을 구할 것인 양 덤벼들었는지 조금은 설명이 된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게 너무 신났다. 일이 잘 되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반대로 일이 잘 안되거나 인정을 못 받으면 크게 상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과 나는 계약 관계일 뿐 직업을 통한 자아실현은 취준생에게 심어진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반쯤 ‘붕괴’됐다. 또 본격적으로 어른에 진입해 신난 또래들이 한강뷰 아파트와 외제 차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두 번째 현타가 왔다. 참으로 혼돈의 나날이었다. 그 무렵 한창 꿈과 어른 됨에 대해 골몰하다 적어둔 다짐을 소개한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 미未도 노老도 붙지 않고 온전히 사회의 일원으로 취급받는 나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수도 없이 꿈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막상 성인이 되고 나니 더 이상 꿈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이 없네요. 이 자리를 빌려 오랜만에 그려본 꿈의 초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내가 하는 일의 이름과 내가 속한 조직의 이름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2. 눈앞에 펼쳐진 기회의 망망대해와 생산적인 젊음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초월하고 그냥 잘 놀고 싶습니다.
3. 내가 가진 게 마이쮸 한 박스보다 훨씬 크고 많아져도 그걸 나누는 게 쉬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박한 듯 어려운 꿈입니다. 흰머리가 더 눈에 띄게 난다던가 부양할 가족이 생겼을 때도 유효할 꿈인지는 모르겠어요. 우선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슴슴하게 잘 노는 욕심 없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또다시 낯선 어린이가 마이쮸를 나눠주면 충격받지 않고 기쁘게 먹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고작 길 가다 모르는 아이가 베푼 마이쮸에 구구절절 반성할 정도로 내 걸 사수하려 애썼던 시기였다. 이를 계기 삼은 결심은 지금 읽어도 유효하다.


이젠 좀 철이 들었나? 일단은 일과 잘 화해했다. 물론 지금도 나를 들들 볶으며 일하지만 내 노동을 성공과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으려 노력한다. 포부가 사람을 잡아먹지 않도록. 호기심과 진심이 오래도록 일의 동기가 되도록. 그리고 더 많이 가지기보다 없이도 잘 사는 법을 고민한다. 욕심이 커진다 싶을 땐 가진게 다 사라진 삶을 상상한다.



느리고 흐릿하게

햇볕을 쬐는 히로야마. 출처: 영화 '퍼펙트 데이즈'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은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그는 인생에 별다른 목표가 없어 보인다. 영화는 두 시간 동안 그의 조촐한 일상을 따라간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점심을 먹고, 혼자 책을 읽다 잠든 후 좋아하는 올드팝을 들으며 다음 아침을 시작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영화가 깊어지면 매일매일에 변화를 주는 작은 것들이 보인다. 점심을 먹으며 바라보는 나무의 그림자라던가 다른 청소부가 두고 간 귀여운 쪽지 등. 어쩌면 삶의 진정한 풍요는 이런 모호하고 약한 것들에서 온다. 멍하니 존재하고, 예쁜 친절을 알아보고, 느리게 생각하는 시간.


그 반대 편에는 생산성에 대한 페티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효율적으로, 더 정확하게, 더 많이... 끊임없이 새로운 해결책을 쏟아내는 시장과 혁신에 몹시 피로해졌다. 많은 게 충분히 편하고 쉬워졌다. 대신 자본주의가 ‘무쓸모’라고 치부하는, 사랑과 우정과 예술이 더더욱 주인공이 되는 시대일 순 없을까? 예측 불가능하고 더 수고스러워서 특별하다면? 내게는 가장 중요한 축이기도 했다. 가장 사는 것 같을 땐 사랑이 있었고 가장 건강할 땐 우정이 있었다. 외로울 땐 영화관에 가고, 읽고 쓰며, 낯선 곳을 쏘다녔다. 이들이 불안과 허무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누군가 “너는 복잡하고 어려워”라는 말을 해주었을 때 가장 이해받은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 사람이 이렇게 어렵지, 모든 걸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 앞으로도 인생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날이 숱할 것이다. 흐리고 탁할 것이다. 영원히 알지 못할 것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래서 글을 써서 다행이다. 글을 쓰며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헤매고 부조리를 포용한다. 때로는 기구한 생각을 굳이 꺼내 남들이 보게 해야 하나 싶지만... 결국 쓰기와 쓰지 않기에서는 쓰기를 택하고 수신자 없는 편지를 부치게 된다. 답이 없어도 연대를 느끼니 참 미스테리다(혼자 헤매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해서일까?). 이번엔 쓰다 보니 글이 좀 장엄해졌다. 그래도 30년 산 기념이니 그래 버렸다.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기념하며.


채우다 보니 경이로운 삶이었고, 생생한 젊음이다.
- 작년에 쓴 노트
나는 주제가 사소하든 방대하든 주저하지 말고 모든 종류의 책을 쓰라고 권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여행하고 빈둥거리고 세계의 미래와 과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책을 읽고 공상하고 길모퉁이에서 서성거리고 생각의 실을 강 속 깊이 담가볼 수 있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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