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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파티

가장 중요하고, 가장 따뜻했던 순간

by 이은경

라면을 먹는다. 는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 가족에게는 라면을 먹을 때마다 이유가 있다. 그냥 먹는 법이 없다. 아이들에게 따신 밥이 아닌 라면 면발을 권할 때마다 느껴지는 죄책감에 정당한 이유를 찾아 갖다 붙인다. 궁금해하는 이가 없다. 그럼에도 항상 이유를 찾는다. 이유를 찾지만 논리가 없다.


유럽 여행에서 라면을 먹는다. 는건 이유가 필요없어서 좋다. 오일 스파게티와 마르게리따 피자, 혹은 크루아상과 치즈에 질려버린 우리들이 라면을 먹는다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할까.


라면을 많이 싸들고 갔다. 캐리어 두 개 중 작은 것은 온통 식량, 그 중에서도 라면들이었다. 우리가 사랑한 진라면 순한 맛. 여섯 번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는데, 여행 일정 18일 간 정확하게 열심히 끓여먹었다. 라면을 먹을 땐 항상 <라면파티>라고 불렀다.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데 이게 파티가 아니고 무엇일까.


한국에서도 라면을 좋아하던 아이들이었지만 왠만하면 덜 먹이려고 노력했었다. 부모의 의무감에 시달렸다. 좋은 부모 노릇을 하느라 라면을 멀리하며 살았다. 그랬던 우리가 라면 앞에 하나가 되었다. 아이들이야 원래 그랬으니 그랬다쳐도 남편과 나도 라면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국물에 그냥 무너졌다.


유럽에 가면 그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풍미 넘치는 맛집들을 열심히 순례하리라, 야심차게 계획했었다. 계획이 무너지는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쫄깃하고 치즈향 가득한 바게뜨 샌드위치 때문에 입천장이 까지고, 오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알 수 없는 이름의 피자를 먹고 나면 속이 느끼해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시원치가 않다. 여행을 다니니 밥 안해도 되서 넘 좋겠다며 잔뜩 기대하고 떠나왔는데, 돼지고기 사다가 고추장 팍팍 넣고 제육볶음 좀 해먹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이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내가 간사한 것인가.


아이들이 유난히 피곤해하고, 일정이 복잡했던 날 저녁엔 <라면파티>를 열었다. 식당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고, 먹고, 계산하고. 이 과정들을 기분좋게 해낼 자신이 없는 날은 숙소로 서두른다. 숙소엔 진라면 순한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냄비와 가스렌지가 있는 숙소는 몇 되지 않았다. 전기 주전자로 끓인 물을 라면 봉지에 붓고 입구를 꽁꽁 막은채 삼분을 기다리면 사랑스러운 봉지라면이 만들어진다. 그릇도, 젓가락도 변변치 않은 것 투성인데도 봉지 속에서 폴폴 익어가는 면발과 따뜻한 국물 냄새를 맡으면 미치도록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의 피로가 가셨다. 라면을 즐기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 날의 그 라면은 그냥 최고였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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