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길이라는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
이동길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
이동길이라는 사람은 내 남동생이다. 86년생. 1남 3녀 중 1남 역할을 하고 있다. 손윗시누가 셋이라 장가가긴 글렀다. 놀랍게도 실명이다. 만화에나 나올법한 이름인지라 놀려먹기 딱 좋았다. 고길동, 길동이, 똥기리, 기리. 유치해 보여도 이름 갖고 놀리는 게 제일 쉽고 재밌다. 나는 지금도 길동이 새끼라고 부른다.
동길이는 재수 끝에 교육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 또 한 번의 재수 끝에 초등임용고사에도 합격했다. 공부를 잘하고 열심히 하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가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지는 몰랐었다. 우린 적당히 지내던 무심한 남매 사이였으니까. 총각 선생이 왠일로 툭하면 1학년을 맡았다. 누나들 밑에서 자라 다정스럽고, 유머감각과 재치로 1학년 담임을 해내며 제법 잘 지내는 듯했다. 뭣 모르고 교직을 선택할 때와는 달리 교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안정된 수입과 노후가 보장된 직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뚜렷한 만족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이직의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박봉의 고단한 직장이기도 하다. 반대로, 시작할 땐 뚜렷한 교육관이나 직업관이 없었음에도 그만둘 땐 그 좋은 근무 조건과 방학, 공무원 연금을 포기할 만한 미치도록 간절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 또 교직이기도 하다.
1학년 철부지들을 2학년으로 키워 곱게 올려 보낸 2월 말.
사직서를 내고 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그의 결정이 언제 일어난 일인지는 묻지 않았다. 고민의 흔적도 찾지 못했던 무심하고 나 살기 바쁜 누나였을 뿐이다. 저 새끼 대책도 없이 큰일을 저질러 버렸다며 3녀들은 입방아를 쉴 새 없이 놀려댔다. 물론 사랑하는 동생을 향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애정 가득한 쌍욕이었다. 우리는 걱정스러운 일을 만나면 일단 욕부터 하고 시작하는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번에도 기다렸다는 듯 찰지게 욕을 해댔다.
홍대에 외국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인수받은 게 아니라 상가를 얻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처음부터 만들었다. 공사 비용만 얼핏 2억이 들었고, 모두 대출이었다. 나도 그 대출의 일부를 도왔다. 가족끼리 돈거래하는 거 아니랬다. 가족끼리는 하면 안되는 일이 너무 많다. 안되는 일은 한 번 꼭 해보고야 마는 성격이라 나와 남편의 신용을 탈탈 털어 대출을 받아줬다. 해도 괜찮은지 어떤지는 직접 해보고 결정하고 싶었다. 우리의 돈거래는 아름다웠다. 밥 사 먹을 돈도 없던 사업 초기에도 꼬박꼬박 이자를 입금했으며, 원금을 상환하는데도 몇 달 걸리지 않았다. 해도 되는 거였다. 여행을 좋아하고 즐기던 건 알았지만 그걸 업으로 삼을 줄은 몰랐다. 한 푼 없던 가난한 총각이, 배운 거라곤 초등교과 심화과정 뿐이며, 경력이라곤 4년 남짓한 교직뿐인 그가 승부수를 던졌다. 자식들을 교사로 만드는 게 꿈이었던 부모님의 걱정과 마음고생은 굳이 적을 필요를 모르겠다. 당연한 것은 적지 않는다. 두 분은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가셨다.
게스트하우스의 인테리어 공사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 온 식구가 동원되어 페인트를 칠하고 빠데질을 했다. 육아휴직 중이던 나는 아이들을 떠밀 듯 학교로 출발시키고 바로 지하철에 올랐다. 난생 처음 페인트칠을 해보고 온갖 공사 먼지를 뒤집어쓰는 날들이었다. 시간 날 때 한 번씩 찾아갈 때면 부모님은 새하얀 먼지와 페인트를 뒤집어쓴 백발이 되어 늘 그 곳에 계셨다. 일 잘하는 동길이의 친구들은 잘하는 만큼의 고기를 먹어치우고 갔다. 그렇게 홍대입구역에는 전에 없던 게스트하우스 하나가 생겨났고 절찬 영업 중이다. 월 순이익 천만원이 넘어가는 대박행진 끝에 2억의 대출을 갚았고 이제야 본전이란다. 사는 게 뭐 그렇다. 그 본전 찾느라 수액까지 맞아가며 무단 애를 쓰는 게 사업인가 보다. 돈이란 것은 최대한 안 쓰고 차곡차곡 벌고 모아 아파트 대출 갚는 일에 소중하게 사용해야만 하는 줄만 알고 살아온 내게는 참으로 낯선 돈의 단위들이었다.
그가 또 일을 벌렸다. 이번엔 모임 까페란다. 분주하다. 체인점까지 내보겠다며 야심차다. 또 한 번의 성공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만 다행인 건 이번엔 대출이 1억 안쪽이란다. 조금 더 빠르게 대출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은 대출 액수가 좀 덜하다는 것 하나 뿐이다. 이번에도 동길이는 며칠 밤낮을 꼬박 새가며 까페에 조명을 달고 못을 박았다. 결심한 지 두 달여 만에 홍대 입구에는 전에 없던 멋진 까페 하나가 생겨났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까페의 매출이 게스트 하우스의 매출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보다 훨씬 빠르게 들려온 소식. 대단한 놈이다. 동길이라는 유아틱한 이름이 무색해진다. 그는 이제 ‘이대표님’이라고 불린다. 그래봤자 여전히 내겐 길동이 새끼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랑하는 동생의 사업이 또르르 잘 굴러가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마음이 문제였다. 마음들이 좀 이상해져왔다.
사돈도 아니고 피를 나눈 가족이 땅을 샀는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척척 벌어들이는 꿈같은 액수와 늘어가는 사업장. 젊은 나이에 빠르게 이룬 성공 앞에서 주변인들의 행복지수는 낮아졌다. 3녀들의 마음이 비슷했다. 똑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월급을 받던 우리 부부의 심정은 더 복잡했다.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었던 걸까. 지금이라도 시작해볼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게 인생 아닌가. 아니야, 동길이도 마냥 좋지만은 않을 거야.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우리를 부러워하거나 사표 던진 일을 후회할 지도 몰라. 조금이라도 후회하거나 아쉽다는 말을 해주길 바라며 슬쩍 질문을 던져보지만 지금의 바쁜 일상이 힘들지만 재미있다며 만족스러워하는 대답에 풀이 죽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월매출을 훌륭하게 뽑아내고 있는 삶이 부러워 괜히 내 일상이 초라해졌다. 반 아이들과 교감하는 소소한 즐거움도 시시하게 느껴졌고, 매달 17일이면 어김없이 입금되는 월급도 고맙지 않았다. 뭐 괜찮은 사업 아이템 없을까 포털 사이트를 두리번거렸고, 책을 보러 서점에 가도 에세이나 소설보다는 성공 신화를 일군 대박 창업자들의 자서전을 들추며 나의 가능성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온갖 복잡 미묘한 감정들 사이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건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이다. 이 일은 정말 중요하고 중요한 일이라,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건강한 몸과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앞에서도 행복을 좀처럼 느낄 수가 없다.
그의 인생을 본받기로 했다. 여섯 살 어린 동생의 모습에서 배움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그것 밖에는 달리 지금의 내 마음을 추스릴 방법이 없었다. 동길이에게 돈을 빌릴 수도 없고, 돈을 빌려줄 수도 없고, 까페에 가서 커피를 내려줄 수도 없는 노릇. 동길이는 그의 몫의 삶을 열심히 살며 대출을 갚아갈 것이고 나는 내 몫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며 내 앞에 주어진 대출을 또한 갚아갈 것이다. 진심으로 동길이에게 고마운 것은, 동길이의 사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동길이의 성공을 지켜보고 부러움에 못 견딘 내가 뭐라도 해야겠다며 시작하다가 찾은 일이 바로 이것, 흰 종이에 글자들을 주욱 늘어놓고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는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