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하고 성실한 죄
타조에 관한 추억이 있다. 비슷한 추억을 가진 사람은 없을, 희귀한 추억이다.
6학년 때, 아빠께서 갑자기 타조를 구입하셨다.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타조 맞다. 식구 수대로 여섯 마리를 사셨다. 사서 봉지에 담아 집에 들고 들어오신 건 아니고, 농장에 위탁하여 키우기로 하셨다. 공무원이던 아빠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투잡, 부업, 재테크 그런 의미에서 한 마리에 500만원짜리 타조를 여섯 마리나 덜컥 사셨다. 타조 가죽의 주가가 엄청 올라갈 거라는 업자의 말에 솔깃하셨던 모양이다. 내가 귀 얇은 게 딱 아빠를 닮았다.
타조 농장을 찾은 우리는 신기해서 입이 벌어졌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못마땅한 티를 계속 내셨지만 아빠는 농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타조를 보며 기쁨에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한 우리에 모여 있던 타조 여섯 마리. 저것들이 우리 아빠 꺼라니 이런 신기하고 들뜨는 일이. 그 곳에 두고 잘 키워서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아빠도 한떳 들떠 계셨다. 타조 구입을 끝내 막지 못한 엄마만 입을 삐죽거리고 계셨다. 아주 가끔 한 번씩 가서 타조를 들여다 봤다. 눈동자가 오백원 동전보다 더 크고 생각보다 훨씬 키가 크고 멋있었다. 중학생이 되어 바빠진 나는 타조가 잘 있는지 점점 무심해졌고, 한 마리가 비실거리다가 죽었다는 소식에 잠시 놀랐지만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내게.
그러던 어느 여름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집에 계시던 아빠가 유난히 나를 반기신다. 얼른 손을 씻고 오라신다. 후딱 교복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보니 싱크대 도마 위에 피가 뚝뚝 흐르는 커다랗고 벌건 고기 덩어리를 꺼내 놓고 웃고 계신다. 이게 그거란다. 눈 크고 키가 매우 큰 그 타조란다. 이제 그만 키우기로 했으니 맛있게 먹자고 하신다. 오늘 아침까지도 농장을 걸어 다니던 싱싱한 타조가 도마 위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닭이나 오리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그 덩어리의 크기가 상당했다. 아빠는 고기를 꺼내 놓고는 내가 집에 오길 기다리셨던 것이다.
“아, 그래요? 네, 썰죠 뭐.”
가장 잘 드는 칼을 들고 차분하게 썰기 시작했다. 피가 흥건하여 고무장갑을 낄까도 생각했지만 손이 둔하여 잘게 썰기 힘들까봐 맨손으로 꼼꼼히 썰었다.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썰어서 차곡차곡 쌓아놓으니 잘한다고 칭찬해주셨다. 생고기가 처음에는 좀 빡빡해도 리듬을 한 번 타면 속도가 붙고 괜찮다.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덩어리가 커서 시간이 꽤 걸렸다. 절반이나 썰었을까. 아빠가 갑자기 서두르신다.
“비닐로 덮어 치워라.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 연화 올 시간 됐네. 연화는 이런 거 나와 있는 거 싫어하니까 오기 전에 얼른 치우자.”
비위가 약하고 후각이 예민한 여동생이 혹시라도 피 흐르는 고기를 볼까봐, 그걸 보고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치우라는 거였다. 고기를 봉지에 묶어 냉장고에 넣고 흥건했던 도마와 칼은 싹 씻어냈다. 걔가 좀 까탈스럽긴 했다. 괜히 핏자국이 눈에 띄면 피곤해진다. 다행히 동생이 도착하기 전, 타조의 흔적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아빠와 나는 씩 웃었다.
그 날 중요한 삶의 방식 한 가지를 배웠다. 조금은 예민하게 까탈스럽게 유난하게 굴어야 대접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랬다면 푸줏간의 백정처럼 칼을 휘두를 일도 없었을 거라는 사실. 둔하고 성실하게 살다보면 별 놈의 일을 다 하게 되기 때문에 인생 경험도 풍부해진다는 사실.
왜 나에게만 타조 고기를 썰으라고 시켰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빠는 기억하지 못할게 분명하다. 만약 기억한다면 아빠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실 거다.
“은경이 니가 성실하고 차분하게 이런 일을 잘 하잖아.‘
아빠는 잘못이 없다. 동생은 더욱 아무 잘못이 없다. 열심히 고기를 썰었던 나도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괜히 좀 억울한 기분도 들고 손이 피범벅이 되도록 열심히 썰던 내 모습이 떠올라 킥킥거린다. 타조 생각만 하면 새빨간 피를 뚝뚝 바닥에 흘려가며 썰어대던 생각이 나 자꾸 웃음이 난다. 나는 성실하고 차분하여 고기 써는 일을 유독 잘하던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