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즈음, 새로운 이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욕심이겠지
과한 시력을 타고 났다고 자랑하기엔 치아가 많이 부족하다. 지금처럼 초등생들도 거침없이 신경 치료를 받아 은니를 번쩍거리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치통으로 밤새 끙끙 앓았던 기억이 낯설지 않다. 몹쓸 게으름과 많은 잠을 타고 태어나 졸음이 솔솔 몰려오는 초저녁이면 잠든 척을 하며 저녁 양치질을 건너뛰기 일쑤였다. 저녁을 먹고 바로 닦았다면 좋았겠지만 방금 말했듯 게으른 사람이라 그건 내게 불가능했다.
조각만한 유치들이 하나둘 썩어들어가 아픈 이를 붙잡고 울며 잠든 유년 시절이 있었다면 새로 난 영구치가 세상빛 보고 얼마 되지 않아 황금틀 안에 갇혀야 했던 학창 시절도 있었다. 신경 치료의 찌르는 듯 불쾌한 느낌이 싫어 열심히 이를 닦았지만 타고난 약한 치아는 여섯 개의 금니를 선물했다. 바쁜 입시 준비 시절, 밤 11시까지 야간자습이 의무이던 시절, 쉬는 시간에 미리 저녁 도시락을 까먹은 후 저녁 시간에 외출증을 받아 치과 의자에 누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가 아파 도저히 책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금이빨 하나의 가격은 우리 집의 형편에 비해, 당시의 물가에 비해 많이 높았고 수차례의 신경 치료 끝에 금니 하나를 씌우고 일단 급한 불을 끄기까지 몇 주간을 치과로 달려야 했다. 1997년 충북 제천시의 시내 어디쯤 병원 건물 근처의 저녁 6시, 제천여고 교복을 입고 달리는 여학생을 본 적이 있다면 나다. 7시까지 돌아가 책상에 앉아야 했기에 걷는 건 사치였다. 그 때가 내 인생 가장 열심히 달리던 때였다. 그 때의 간절함으로 꾸준히 열심히 달렸다면 형편없는 근육량으로 헬스장 트레이너의 눈치를 볼 일은 없었을텐데. 그 후론 달려본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의 짜증을 기억한다.
바쁜 저녁 시간, 아빠의 저녁을 준비하고 어린 동생의 학원도 챙겨야했던 엄마는 매일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치과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다. 엄마의 짜증이 생생히 기억난다. 약한 치아를 타고 태어나 치료하느라 고생하는 딸에 대한 안쓰러움은 저년이 이를 제대로 안 닦고 자더니 결국 이 꼴이 되었다는 짜증스러움으로 서서히 바뀌어 갔다. 이제 난 엄마의 짜증을 생생히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날 닮아 치과 신세를 면치 못하는 아들과 함께 간 치과에서 십만원이 넘는 돈을 결제하며 끝내 짜증을 숨기지 못하는 엄마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약하게 타고 난 치아에 대한 원망을 30년째 하는 중이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이의 치아 검진 중 의사 선생님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아이의 치아가 과하게 빠르다는 것이다. 키도 성장도 빨라왔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너무 빠른데' 하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잘못도 아닌데 괜히 위축이 된다. 늦을수록 좋다는 영구치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는 배드 뉴스를 전하는 선생님께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거죠?' 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것 말고는 딱히 더 할 것이 없어 슬그머니 진료실을 돌아나왔다. 죽을 때까지 써야하는 영구치는 왜 만10세짜리 아이의 잇몸에서 급하게 올라오고 있는 것인가. 남은 90년 동안 이 이를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비용을 들여야 할까. 들인다면, 그렇게 기꺼이 수고와 비용을 감수한다면 이 아이는 남은 90년 동안 잘 씹고 잘 먹으며 지낼 수 있는 걸까. 약한 치아를 대물림해준 엄마의 괜한 투정 쯤으로 생각해주시길
인생의 모든 수고들을 마무리하고 그 동안의 수고와 고생을 보상받을만한 편안한 안식을 기대해도 좋을 60대가 되면, 이제 여유롭게 맛집도 다녀보고 싶고 자식들 먹이느라 못 챙겨 먹었던 것들 맘편히 먹어보고도 싶고 먹는 것이 중요한 일상의 낙이 되는 그 때가 되면, 인생의 황혼을 축복하고 수고에 감사하고 남은 인생 후반기를 행복하게 보내라는 의미로 이를 한 번 싹 갈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 금니, 은니, 레진이니 아말감이니, 임플란트와 틀니까지. 이런 복잡한 시술들로 아슬하게 떼우고 붙이고 끼우고 심지 말고 자고 일어나면 새하얗게 쑤욱 올라와 있던 유년기의 그것들처럼 튼튼하고 깨끗한 치아를 선물받았으면 좋겠다. 퇴직이 가까워오는 중년의 신사들이 모여 이는 갈았냐며, 나는 원래 좀 빠른 편이라 올해가 환갑인데 벌써 새 이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자네는 동안이니 몇 년은 더 지내야 이를 갈게 될 것 같다며 새로이 선물받게될 치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껄껄 웃었으면 좋겠다.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며 마치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처럼 흐뭇해하다보니 한 가지 걸리는게 있다. 하나뿐인 제부인데, 그는 하필이면 임플란트용 치아를 만들고 판매하는 회사의 중역이다. 치과들을 다니며 원장님께 우리 회사 임플란트의 우수성과 늘어날 수요를 공들여 설명하는 사람이다. 갈수록 늘어가는 임플란트 인구와 수요를 반가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내 하나뿐인 여동생과 사랑스러운 조카들을 생각하니 10대의 치아를 그럭저럭 쓰다가 언제쯤엔 하나씩 순서대로 임플란트를 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은경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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