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때문일까, 영어 덕분인가

영어 덕에 먹고 살게됨을 감사하며

by 이은경

모든 게 영어 때문이다.

모든 게 영어 덕분이기도 하다.


영어를 못하면 굶어 죽거나 챙피해 죽거나 엄마가 피말려 죽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들. 통역기와 번역 어플이 날로 정교해져 가지만 그럼에도 영어를 더 잘하고 싶어 안달하는 우리들의 아이러니한 모습. 영어권이라는 이름 하나로 전 세계 수많은 장단기 유학생들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몇몇 국가들에 대해 혀를 차다가 ‘결국 우리도 영어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이다’라는 민망한 결론에 도달한 언니와 나는 영어라는 언어에 감사하기로 한다. 그놈의 몹쓸 영어라는 놈 때문에 엄마들은 헉하게 비싼 돈을 내고 낯선 땅의 영어캠프라는 곳에 비행기를 태워 보내놓고 아이의 말문이 언제쯤 터지려나 노심초사 기다리는 일 밖엔 딱히 할 수가 없는 웃지 못할 현실. 나란 사람은 실상 좀처럼 발전이 없는 아들의 영어 실력에 답답해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엄마일 뿐이지만 한편으로는 영어 덕분에 일자리를 얻었고 결국 먹고 살고 있다. 영어라는 과목이 없었다면 애초에 영어캠프라는 것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몇 마디 주고받을 줄 아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사이판행 비행기에 함께 올라탈 수 없었을 터. 그놈의 잘난 영어 덕분에 한 달간 그림처럼 아름다운 섬에서 해주는 밥 먹어가며 필요할 때 짜잔 나타나 몇 마디 주절거리며 상황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단 말이다.

그 잘난 영어 때문에.


소싯적 얘기 안하고 넘어가려나 했는데 결국 해야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영어에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누르지 못하고 강남의 영어학원에서 퇴근 후 고기만두 한 판으로 저녁을 떼우고는 하루 네 시간씩 꼬박 영어를 붙들고 불을 키던 통번역대학원 입시생이었다. 그 때 왜 그렇게 그게 하고 싶었나 했더니 영어캠프 교육실장 명함 받으려고 그랬는갑다. 입시는 결코 호락하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 제법 변변한 영어실력을 남기고는 슬며시 인생에서 사라졌다. 대학원은 사라졌지만 영어는 남았다.

그 때 익힌 고급영어는 캠프 아이들이 아파 병원 진료를 받아야 할 때면 응급실 의사의 의학 용어를 바로 알아듣고 제깍 오케이를 외치게 했다. 꽤나 쓸모있는 영어다.

영어 덕분이다.


영어 때문에 모여 함께 비행기에 오른 우리는 그 잘난 영어권 국가인 미국령이라고 하는 남태평양의 어느 한적하고 작은 시골 섬에 착륙했다. 영어라는 언어를 갖지 않았다면 평생 한 번 오갈 일이 없었을 거제도보다 훨씬 작고 낡은 섬에 말이다.


도착.

본격적인 영어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전쟁은 학교에서 첫 총성을 울렸고 등교 첫날의 레벨 테스트부터 시작하여 영어로 수업을 듣고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영어 한 바닥을 외워야 하는 과제까지. 전쟁은 급하게 달아올랐다.

‘이거 외워오래요’

‘오늘 이거 배웠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영어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너덜너덜해져가는 캠프의 아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던 나는 멀쩡했느냐, 결코 아니다. 같은 시간, 교실 속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최전방맨 앞줄에 홀로 서 있는 장수가 되어있었다.


아이들이 때로는 교실 안에서 졸기도 하고 딴 생각도 하던 시간, 나의 영어는 쉴 수가 없었다. 학교의 행정 직원에게 아이들 등록을 부탁해야 했고, 수업 시간 및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관한 안내를 받아야 했다. 수업 시간과 교육 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하며 각 주차별 커리큘럼도 안내해주는 친절한 그들은 그래봤자 내게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듣기평가 녹음자료들일 뿐이었다.

중요한 일정에는 대부분 언니가 동행하고 있었는데 언니는 나를 믿는 구석이 있었던 터라 듣기평가가 끝나면 무심한 듯 물었다. “뭐래?”

그렇게 나의 영어 듣기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이번 캠프를 통해 가장 영어 실력이 향상된 사람은 매일 숙제를 성실히 외워가던 6학년 시은이가 아니었고 현지 친구들을 제법 사귀어 영어로 적은 쪽지를 주고받던 선웅이도 아닌 바로 나, 캠프 선생 이은경이었다.


그러저러하며 본의 아니게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 그룹을 설명하고 우리 캠프의 취지를 알리고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기 위해 생존 영어를 써가며 진정한 영어캠프의 수혜자가 되어가는 나. 그리고 영어캠프의 본래 취지에 걸맞게 하루 여섯 시간 넘게 영어 수업을 들으며 저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를 머릿속으로 수없이 반복하며 의심하고 추측하며 실력을 키워가는 아이들. 너희들의 캠프가 아니라 우리들의 영어캠프였다.


고작 한 달짜리 영어캠프에 가는게 영어 실력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의심들 하겠지만 우리들의 캠프는 진정한 영어캠프였다. 영어 덕분에 비행기 탔고 영어 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우리들. 하루 여섯시간씩 교실에 앉아 허벅지 찔러가며 버티기에 성공, 결과는 상당히 달콤했다.


우리, 이제, 좀, 들린다.

우리, 이제, 좀, 말하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공항의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