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인간의 글

훈련소에서

by 밈바이러스

내가 SF에서 나올법한 냉동인간과 유사한, 냉장인간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이곳(군대)에서의 생활은, 시간이 느리게 가기는 하지만 결국 나의 유통기한(수명)이 줄어들고 있고, 남들이 상온(사회)에서 저마다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곳은 상온과 단절돼있고, 비교적 느긋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내 유통기한이 18개월 줄어드는 동시에, 내 품질이 향상되지 않은 채로 사회에 팔려나갈 수 있겠다. 이 차가운 공간에서 몸이 탄탄해지기야 하겠지만, 냉장고의 법칙에 따라서, 뇌까지 덩달아 딱딱해질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겠다.

수능 문제를 잘 푸는 뇌가 말랑한 뇌고, 고품질이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새로운 기준에 맞게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해야 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회는 어떤 형태로 변모하고 있는가. 이 점들을 고민하여 직업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중이다. 냉장고에 들어오기 전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점차 빠른 속도로 부패하는 중이었다. 그 촉매에는 스마트폰 과다사용과, 중독을 조장하는 호르몬 도파민. 냉장고에서 일시적으로 그 촉매들과 거리두기 중이며, 해독작용 중이다. 어느 정도 회복기를 가지는 중이다. 이를 유지해(관성) 냉장이 풀린 상태에서도 잘 살아가야겠다.

한편, 나에게 그 자신을 아낌없이 쏟아오신 부모님이 지금 상온에서 나보다 수십 배는 빠른 속도로 노화되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적자 아들의 마음이 너무나도 아려오는 것이다. 아무 재주 없는 얄팍한 아들은 무엇을 해야 1인분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피터팬 신드롬. 책임지는 것 없이 아이인 채로 늙어가도 좋을 것 같지만 주변에서 일방적으로 받아온 것들을 생각하면 혼란스러워진다. 아무도 날 몰라주기를 바라며 항상 도망치고 싶어진다. 냉장고에도 어떻게 보면 도망쳐 숨은 것이고.

냉장고에 들어간 지 19일 차, 내일로 20일 차가 되며, 21살의 생일을 맞이한다. 이곳에서 남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면 속으로 침잠해보면서, '내 인생은 너무 보잘것없었다! 이것도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인가?'라는 생각에 뭔가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엉터리 생각임을 저는 잘 알고 있다.

다시금 생각해봐도 내가 나로 사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 없을 수 있는 냉장고 속에서 나는 생각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 되는대로 방황하겠다. 또, 생각했던 것과 문득 생각나는 것들을 글로 옮겨보기로 결정했다.

이기자! 내가 이겨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대부분 나에게 져왔더라면, 이제는 나에게 가끔이라도 이겨보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아이인 채로 늙어가고 싶다.


2020.10.17 토요일,
27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냉장 인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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