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선생의 말에 따르면, 현재 기술과 문화가 엄청나게 진보했지만, “아직도 삶은 생존이고, 발가벗은 동물적 삶인 채로 쪼그라들어” 있습니다. 그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21세기의 오늘을 끌고 가는 병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로 인한 것보다는 신경증입니다.
앞서 살폈듯이, 문화는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물론, 잘 쳐주면 우리와 공생하지만, 어떻게 보면 문화는 우리를 숙주 삼아 마구 자라납니다. 성실함이 미덕이고, 바쁨이 유능함으로 인식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돈 그 자체의 자유를 위해 여생을 잘라내어 팝니다.
주 40시간만 일하면 다행일까요. 지나간 규율 사회 시절의 교훈은 ‘근면 성실’이고, 신자유주의 성과 사회의 오늘날 교훈은 ‘야, 너두 할 수 있어!’입니다. 신자유주의 성과 사회에서는 실패도 성공도 자신의 탓, 자신의 덕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주인이자 노예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그저 “작동해야만 하는 기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착취 대상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낄 때, 정말 위험한 지배가 이루어집니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경영, 자기 개발의 탈을 쓴 자기 착취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사회 경제적 지위 게임에서 한자리 꿰차기 위해 모두가 모두를 상대로 경쟁합니다. 마케터 낸시 샤렉은 “최고의 광고는 그 물건이 없는 사람을 스스로가 패배자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아이들은 그것에 더욱 민감하다. 따라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광고 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감정적으로 가장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18개월 된 아기들도 맥도널드 햄버거의 M을 알아보고, 평범한 아이는 36개월이 될 무렵 이미 100개의 브랜드 로고를 알게 됩니다. 1976년부터 2003년 사이에 미국 전체가 광고에 지출한 돈이 늘어날수록 청소년들이 더욱 높은 강도로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저마다의 해외여행, 일상 경험(영화 시청, 분위기 좋은 카페)을 광고(전시)합니다. 소비자들은 ‘나는 이렇게 좋은 시간을 보냈어’라고 무료로 공간과 경험 상품을 기꺼이 광고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도 왠지 저런 경험을 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모드가 되어 경험에 기꺼이 값을 지불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유전적으로 새로운 경험(특히 여행)에서 엄청난 보상(도파민)을 받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게 이건 기회입니다. 요즘만큼 경험의 상품화가 잘 되어있는 시기가 있던가요?
수많은 광고를 통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물건이든 경험이든 그것을 소유하거나 체험하고자 하는 강한 추동에 이끌리게 됩니다. 하지만 돈이라는 유한한 자원이 필요하기에 소비에 제한과 압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며, 무엇을 경험했는지에 관한 인식이 자아(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확장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럭셔리해 보일 수 있도록 돈(소비)을 통해 자아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특정 상품과 경험 자체가 지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강화에는 점점 더 많은 돈이 들고 강화 욕구에는 끝이 없습니다.
소비를 위해 물질주의적이고 외재적인 동기를 부여받을수록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언제나 수많은 광고가 따라다닙니다. 자아를 강화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좌절하고, ‘돈이 조금 더 있으면 남들에게 나에 대해 할 말이 더 생길 텐데’하는 생각에 왠지 내 존재와 인생이 보잘것없는 기분이 들어 불안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모건 하우절은 “현대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성공한 척 흉내 내도록 도와주는 것을 하나의 산업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며 알랭드 보통에 따르면, 사회 문화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집니다).
* 자본주의는 아주 성공한 밈 복합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 역시 중앙은행에서 생산하는 교환 수단 중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요한 하리의 책 <벌거벗은 정신력>에서 가져온 설명입니다.
+ 자본주의는 ‘남을 위함’, ‘우리를 위함’이라는 포장지로 소비를 교묘하게 정당화합니다(‘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면, 고생하신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돈을 써서 좋은 거 먹고, 고급진 경험을 해야지’. ‘소중한 아이한테 이것 밖에 못해주다니, 난 부모 실격이야’. 사랑, 효도 등의 신성불가침의 단어를 쌈싸먹는 자본주의). 그 결과, 적게 벌고 적게 쓰는 행위는 자본주의 정신에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자본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빌려 끊임없이 자신을 증식시키는 메커니즘을 완성합니다.
행위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자본주의
고갈되고 소진되는 빈약한 자아에
자아 강화를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아
이런저런 소비, 공허한 메아리의 셀피
한병철은 “오늘날의 과도 활동과 과도 소통은 만연한 존재 결핍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존재 결핍은 생산 과잉을 유도하며, 존재 결핍에 물질적 성장이 맞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생산하고 또 소비함으로써 결핍감에 맞섭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과 경험으로 자신의 흩어져 버릴 듯한 자아를 강화합니다. (바쁨은 유능함의 징표기도 하며, 소비에 필요한 재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멋진 나, 더 다채롭고 드라마틱한 삶, 심지어는 영생의 가능성을 낳는다는 환상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서야 삶은 결국 벌거벗은 삶, 곧 생존일 뿐입니다. 우리는 점차 많은 광고에 노출됩니다. 광고는 없던 결핍을 만들어내고, 그 결핍의 틈을 헤집어 놓아 결핍이 더 깊어지게 만듭니다. 여기서 다시, 결핍감은 행위를 재촉합니다. 무한한 굴레입니다. 한병철 철학자는 “필시 생산과 소비는 존재가 0에 이를 때 최고조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떼어놓으려는 자본주의
그렇기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질주
죽음에 대한 살균 시도가 불러온
삶이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 멸균
강박은 인간 실존을 집어삼키고
자신을 기꺼이 내어줌은 사라져
미끄러지듯 0으로 수렴하는 존재,
반대로 무한으로 발산하는 자본주의
“결국,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0으로 수렴시키면서까지 자본주의에 연료를 집어 넣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수많은 답 중 하나로 야마구치 슈의 책 <비즈니스의 미래>의 내용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이 책에서 소개할 다양한 데이터는 우리가 지난 200여 년간 끊임없이 추구해온 ‘경제와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사회에서 물질적 빈곤을 없앤다’는 사명이 이미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주로 ‘저성장’, ‘침체’, ‘쇠퇴’ 같은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되고 있지만, 결코 비관적으로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고대 이래 우리 인류는 항상 ‘생존을 위협당하지 않는 물질적 사회 기반의 정비’라는 과제를 안고 살아왔기에, 오늘날의 상황은 드디어 이 과제를 달성하고 ‘축제의 고원’에 이르렀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과거의 노스텔지어(nostalgia)에 사로잡혀 이미 끝나가는 ‘경제 성장’ 게임에 굳이 연명과 소생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원에 도달했음을 서로 축하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도모해 ‘안전하고 편리하며 그저 쾌적하기만 한 세상’에서 ‘진정 풍요롭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회’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야마구치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우선, 우리 사회가 중요한 전환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이 전환기를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닌 ‘무언가가 끝나는 시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질적 빈곤을 해소하기 위한 기존의 임무는 이제 거의 달성되었으며, 현재의 ‘저성장’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지난 100년간 이룩한 진보와 개선의 필연적인 결과이자 ‘문명화의 완성’이라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저성장은 ‘문명화의 종료’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이며, “문명화를 완료하고 나면 문명화를 추진하기 위해 시행하던 비즈니스가 정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장이 멈추는 것을 문명화의 완성, 즉 목표 지점으로 설정한다면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이 상황에 다다른 국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뒤집어 보면 높은 성장률은 그만큼 문명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늦어지고 있으므로 성장률이 높은 것이다. 이렇게 성장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면 세계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고 세상의 모습도 180도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저성장이라는 말로 사회를 표현할 때 이미 사회에는 고성장과 저성장 두 가지 상태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처음부터 고성장과 저성장 두 가지 상태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종용하면 당연히 고성장이 좋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는 엄연히 유도심문이다.”
“인류의 숙원이라고 할 수 있는 꿈같은 상황이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는 인류 전체가 달성한 위대한 성과인데도, 우리는 손을 맞잡고 마음껏 축배를 들지 못한다. 오히려 모든 조직의 정상에서 말단까지 온통 ‘매출과 이익이 증가하지 않는다’,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 ‘성장 기회를 찾을 수 없다’, ‘신규 사업에 착수할 수 없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과로하는 사람들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대부분이 관여하고 있는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는 본질적인 파탄, 게임이 끝나면 발동하는 시한폭탄이 내장되어 있다는 의미다.”
야마구치 슈가 보기에는, 무한한 성장이라는 사고는 “비과학적인 판타지”입니다. “토마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세계 경제의 성장률이 앞으로 2% 내의 저조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해도 세계 경제 규모는 100년 후에는 현재의 7배, 300년 후에는 370배, 1000년 후에는 3억 9천만 배가 된다. 이를 많은 사람이 바람직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4%까지 끌어올린다면 그 수치는 각각 100년 후에는 현재의 49배, 300년 후에는 약 12만 9천 배, 1000년 후에는 대략 10경 3826조 배가 되어 어느새 의미조차 헤아릴 수 없게 된다.”
“오로지 경제성장률이라는 지표만 좇는 행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리고 경제 성장은 물론 의료, 교육, 복지를 균형 있게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있다. 바로 미국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로, 그의 저서 <풍요한 사회>는 1958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 반 세기를 지나 물질적 만족도가 포화 상태를 이뤘는데도, 갤브레이스의 주장과 역행하는 GDP가 왜 여전히 다른 지표보다 중요시되는 것일까? 아마도 달리 적당한 목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몽테뉴가 말했듯이, ‘마음은 올바른 목표를 잃으면 잘못된 목표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GDP를 산출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더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를 논의한 뒤에, 그렇다면 무엇을 측정해야 그러한 사회의 달성 정도를 측정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일이다.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가 이러한 중대한 논의를 꺼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논의 과정에서는 전문가로서 권위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에 휴머니티, 즉 인간성을 회복시키자. 휴머니티의 회복을 실현하지 못하면 비즈니스도 경제도 점점 더 비인간적인 행위로 치달을 뿐더러, 그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자부심과 감성을 끊임없이 파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즈니스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즈니스의 내실을 충실히 다지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19세기 영국에서 디자이너이자 사회사상가로 활동한 윌리엄 모리스는 문명화가 종료되고 누구나 어느 정도 물질적 풍요로움을 향유하게 된 세계에서 인간에게 남겨진 최후의 일은 ‘장식하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멋진 비전입니까. 이것을 약간 딱딱한 말로 표현해보겠습니다. 문명적 풍요로움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20세기까지 비즈니스의 역할이었다면 현재 우리 인류에게 남겨진 역할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아직까지 문명적 풍요로움을 향유하지 못한 채 ‘남겨진 사람들’을 ‘문명적 풍요로움을 향유하는 쪽’으로 데리고 오는 일. 둘째, 문명적 풍요로움을 이미 실현한 사람들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아이들이 ‘태어난 건 행운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 아닐까요. 그리고 이 두 가지 역할이야말로 비즈니스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주디스 버틀러,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 이번 꼭지의 내용은 야마구치 슈, <비즈니스의 미래>, 2022, 김윤경 역, 흐름출판의 내용을 옮겨왔습니다. 특히 “ ”의 내용은 직접 인용입니다.
(다음 세 꼭지는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의 내용과 표현을 옮겨왔습니다.)
한병철은 우리가 너무나도 절대적인 존재 결핍을 겪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진정한 존재는 ‘함께-존재(being-with)’할 때 가능하다고 보는데,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는 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 체제는 개인에게 끝없는 자기 최적화와 성과를 요구하며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잔인한 경쟁으로 내몰아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삶은 고삐 풀린 경쟁 지옥으로 변모”하고, 개인은 지치고 소진되어서 혁명을 일으킬 힘조차 잃어버립니다. 외부를 향해야 할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인터넷에서는 그 분노가 (사회가 아닌) 서로를 향합니다.
그는 디지털화 역시 ‘함께-존재’의 기반을 갉아먹는다고 말합니다. “네트워크에 속해 있음과 진정한 결합은 다르다. 무제한의 연결성이 오히려 관계와 결합을 약화시키고, 디지털 세계에서 타인은 처분 가능한 ‘그것’이 되어버린다.” 그 결과, 세계의 연결성이 증가했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원초적인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 사용되는 소비 가능하고 처분 가능한 ‘그것’은 집약적 결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타인을 통해 세계를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나’를 통해서 봅니다. 관심 없는 정보는 손가락으로 밀어내고, 좋아하는 것은 두 손가락으로 줌 인합니다. 불편한 것은 밀어내고,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나만의 왕국’을 건설합니다. 스마트폰을 건드리는 손가락은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바꾸고, 세상마저 스마트폰 속에서 디지털화되어 소비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진짜 세상과 온전히 관련 맺지 못하고, 내 안에서만 발버둥 칩니다. 이처럼 ‘나’하고만 부딪히는 것, 그것이 우울증의 한 측면입니다.
틴더와 같은 데이팅 앱들은 타인조차 소비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타인을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활용할 도구로 만들 뿐입니다. “‘너’라는 존재가 동경의 대상이거나 나의 맞섬 상대가 되어야 하는데, 디지털 공간에서는 타자가 사라진다.”
상대가 ‘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저항한다고 느껴지면 쉽게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르시시즘이 강화됩니다. ‘타자가 서 있어야 나도 설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와 맞서는 ‘맞몸’을 가진 타인이 없다면, ‘나’라는 자아는 스스로에게 갇히게 됩니다. 수많은 것들이 디지털과 맞물려가는 세상에는 결합해서 함께-존재할 수 있는 네가 아닌 ‘그것’이라는 도구만 있을 뿐입니다.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은 매끄럽고 고분고분하여 저항성이 없다. 마치 힘껏 열어야 하는 대문 대신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과 같다. 저항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맞섬’의 경험을 잃는다. 스마트폰은 ‘부정성’도 없다. ‘좋아요’만 외치는 아첨꾼들이 가득하다.” 타자의 부정성이 없어서 오히려 불행하고 우울하고 외로워집니다. 끝없이 ‘나’하고만 부딪힙니다. 편안함은 있지만 왠지 불행을 느낍니다. “스마트폰에서 손가락을 놀리다가 우리는 육체를 잃어버리는 듯한 탈신체화를 경험”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신체가 디지털 속에 갇히면서, 물리적인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상호작용하는 감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타자성의 상실은 결국 우리를 고립시키고, 진정한 관계에서 오는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편안함 속의 불행, 연결 속의 외로움은 디지털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역설입니다.
“에로스의 부재는 존재 결핍을 심화한다. 오직 에로스만이 불안과 우울을 이길 수 있다.” 이 문장이 한병철의 핵심 주장입니다.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버린’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성과로 증명하고 최적화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이나 자기 초월의 경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리비도 에너지(생의 에너지)가 타인에게 흐르지 못하고 나에게 역류하여 자신에 빠져 익사한다는 것입니다.
한병철에게 에로스는 ‘자기 밖으로 나아가는 것’, ‘타자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 ‘자신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로스는 ‘나’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경탄, 매혹, 그리고 자신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몰입입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노출’하고 ‘투명’하게 만들면서, 에로스가 발현될 수 있는 ‘은폐’와 ‘신비’의 공간을 없애버렸다고 지적합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이고 소비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욕망(에로스)은 사라지고 오직 ‘소비’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포르노그래피가 모든 것을 보여주어 욕망을 죽이듯 말입니다.
에로스는 닫힌 ‘자기’의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힘이자 불안의 해독제입니다.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예술 작품이나 자연에 대한 몰입 등 자신을 잊고 어떤 대상에 완전히 몰입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타자와의 진정한 연결 속에서 삶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됩니다. ‘의미의 부재’에서 오는 존재 결핍을 에로스가 채워줍니다.
‘나’라는 자아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통제 욕구는 불안을 낳는데, 에로스는 이러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을 내어주는 경험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고 평온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한병철에게 에로스는 단순히 사랑이나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타자에게로 향하는 초월적인 열정이며, 이 열정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나르시시즘과 그로 인한 불안, 우울을 극복하고 진정한 존재의 충만함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에로스의 힘은 무력함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에로스의 종말).”
(다음 세 꼭지(정보의 지배: 정보 가축, 순간적 자극과 흥분: 멈추지 않고 내달리는 시간, 진실의 파괴와 정보의 소음)는 한병철의 <정보의 지배>와 그의 인터뷰를 요약하고 표현들을 옮겨왔습니다. “ ”는 직접 인용입니다.)
한병철 선생은 사람이 스마트폰을 매체로 정보의 가축이 되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이 지배자의 편에 서서 정보 사료를 제공하고, ‘나’는 정보 사료를 소비하는 가축이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습니다. 정보의 지배와 구속이 일어난 것입니다.
억압하는 지배보다 효과적인 지배는 자유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지배입니다. “주인에게서 채찍을 빼앗아 자신에게 휘두르게 만들라. 자기 자신을 끝없이 착취하게 만들라.” 주인에게 채찍을 빼앗은 노예는 자유 속에 사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성과 사회의 지배법입니다.
정보의 지배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요? ‘맛있는 정보 사료를 제공해서 가축으로 만들어라. 뇌의 보상 중추를 자극해 쾌감을 제공하라.’ (앞서 살폈듯, 정보 추구는 보상 추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축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정보 사료를 골라 먹으며 욕구를 채웁니다.
“노예는 저항이라도 할 수 있지만, 가축은 저항하지 않는다. 울타리를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울타리 속에 마냥 머물며 사료를 먹는다.” 입은 점점 까다로워지고 점점 사료를 먹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우리는 생산과 성과 강박에서 벗어나 쉴 때조차 자유롭지 못하며, 왠지 마음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모든 곳에서 소비주의적 삶의 형태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욕구를 거의 즉각 충족시킨다. 기다릴 끈기가 없다.” 분명 기다림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빠른 효과, 신속한 성공이다. 행위는 축약되어 반응이 되고, 경험은 옅어져 체험이 된다. 느낌은 빈곤해져 감정이나 흥분이 된다. 우리는 오로지 관조적 주의 앞에서만 열리는 실재에 접근하지 못한다.” 그렇게 삶은 어느새 얕은 체험을 얼기설기 묶어놓은 잡지에 가까워집니다. 경험의 멸종입니다. 오늘만큼 시간이 빠르게 내달리는 날은 없습니다.
디지털 정보 사회에서 우리는 각종 정보를 쉼 없이 빨아들입니다. 유튜브, 쇼핑,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커뮤니티. 정보는 끝도 없이 밀려올 뿐, 지속성이 없습니다. 한 번 봤던 정보를 멈추어 돌아봤던 적이 언제였던가요. “정보는 놀라움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산다. 한번 놀라움의 꿀을 채취당한 정보는 다른 정보에 밀려난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시간이 너무 짧아 머무르지 못한다. 진리나 지식에 머무름의 가능성이 있는 것과 대비된다.”
우리는 혀끝에 닿으면 사르르 녹는 설탕 같은 디지털 정보를 눈과 귀로 핥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지각 구조가 바뀐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순간적인 자극에 계속 반응하다 보니 뇌의 보상 회로 주기가 짧아지고, 과부하가 걸리고, 사유할 힘을 잃어버린 채, “놀라움이 주는 흥분에 굶주린 맹목적인 정보 사냥꾼이 된다. 혼을 잃어버린다. 사고가 바뀌고 삶이 바뀐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깨달음이 없고, 앎이 없다.” 정보가 끝이 없으니 머무를 틈이 없습니다. 천천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바쁘다 바빠. 경험은 은은히 머물러야 쌓이는 것인데, “시간 집약적인 정보 탐닉은 경험이 되지 못하고 지각과 호흡을 단축”시킵니다.
“숙고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것들에 쓸 시간을 정보들이 가로챈다. 단편적이고 무의미한 정보를 빠르게 훑느라 지각이 파편화된다. 모든 것이 순간적인 것들로 바뀐다.” “흥분과 감정이 순식간에 발화되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하니 뭔가 불안정해지고 허무감을 느끼게 됩니다. “순간적 덧없음 속에서 삶은 불안해진다. 이유 없이 하염없이라는 행복의 공식이 파괴된다.”
“매우 짧은 시간에만 현재성을 띠는 정보들이 연달아 들이닥친다. 우리는 정보들에 둘러싸여서, 멈춤을 잃어버린다. 시간도 연속성을 잃어버리고 파편화된다. 시간이 원자화된다. 파편화된 시간과 지각 속에서 신뢰, 충실, 결속, 의무, 약속 등 미래를 안정시키는 것들이 굳건히 자리 잡지 못하고 순간화되어버린다.” 삶과 시간 미래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현재에 갇힙니다. 여기에 머무르지 못하니 역으로 갇혀버립니다.
“우리는 발 디딤을 주는 땅의 질서 위에 거주해야 한다. 하지만 땅의 질서가 디지털 질서로 대체된다.” 정보가 지배하는 디지털 사회, 정보를 제공하는 온갖 플랫폼을 이곳저곳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디지털 정보 사료를 쓸어 먹습니다. 그러다 보면 삶의 의미와 가치가 흩어지고 방향성 역시 알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방향성이 사라지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진실과 진리는 정보와 달리 지속성이 있다. 멈춤과 곱씹음을 주고 삶을 안정화시킨다. 하지만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인지, 진실이 정보 소음 속에서 사라져간다. 소리 없는 정보 폭탄에 진실은 파열하여 먼지가 되고, 디지털 바람에 흩날린다. 진실은 지난 삶의 짧은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머무를 수 있어야 사유와 사색이 가능한데, 머무름이 없으니 인내와 읽기, 쓰기가 사라집니다. “경제는 발달해서 첨단 도시를 쌓아 올렸지만, 정신은 황무지”입니다.
+ 애덤스 더글라스의 SF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우주의 문명은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생존의 단계(저걸 어떻게 먹을까?), 의문의 단계(우리는 왜 먹는가?), 세련의 단계(무엇을 어디에서 먹지?). 한편, 우리는 세련의 단계에 들어온 듯 싶지만, 의문의 단계를 충분히 거치지 못한 채, ‘남들이 다 먹는 저 세련되어 보이는 걸 어떻게 먹지’의 1단계로 미끄러졌습니다.
(이 꼭지에서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의 내용과 표현을 빌려왔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와 있습니다. 나는 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전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마치 유령이 된 것 같습니다. 삶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요? 정말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입니다.
우리는 100년의 시간을 긴 호흡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나름의 서사(인생의 이야기)를 꾸리며 삽니다. 벽돌 한 장 한 장 차곡차곡 쌓아가며 서사라는 벽돌집을 짓습니다. 이 작업은 하염없이 지루하고 단조롭습니다. 한편, 벽돌집을 짓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습니다. 스토리(또는 정보). 무한한 세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파라다이스 OTT, 흥분되는 뉴스와 오락거리, 유튜브, 남들의 편집된 ‘순간’이 전시되어 있는 인스타 스토리.
A는 감각적인 예술 영화와 세계 최고 미남미녀 배우가 나오는 황홀한 로맨스 영화를 봤다. 영화관을 나온 A는 칙칙한 하늘에 우울감을 느꼈다고 보고했다. 자신 삶의 황량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인생에서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지 뭐가 문제인 건지 곱씹어 봤다고 한다.
- 파스칼 브뤼크네르,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우리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닌 특수한 이야기에 끌립니다. 자기보다 커다란 우주적인 클래스의 영웅 이야기(어벤저스). 상위 0.1%의 삶과 사랑과 재능, 또는 하위 0.1%의 불행을 다룬 이야기.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에 비해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밋밋해 보입니다. “영화는 영화로 봐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과다하게 부풀려 놓는 풍선 바람 주입기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을 점령해 버린 인터넷, 인스타그램, 그리고 유튜브입니다. 인플루엔서는 자신의 화려한 일상을 편집해서 전시하고, 친구들은 자신들이 ‘잘 놀고 있다’는 것을, ‘나 이렇게 잘 살아’하는 순간을 엄선해서 스토리나 게시물로 올립니다. 자칫 ‘다른 사람들은 다 저렇게 사는데 내 삶은 왜 이렇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이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현대의 여가시간이 ‘비생산적인 활동하는 소비하는 시간’이 되었으며, 자신이 좋아하고 있는 것을 열심히 즐기고 있다는 것을 열심히 피력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서사의 벽돌집을 쌓는 단조로운 작업 도중 신선하고 재밌는 자극적인 이야기(정보)가 끝없이 쏟아집니다. 스토리(정보) 추구는 쾌락 추구랑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스토리를 흡수하는 순간 우리 뇌의 쾌락 중추가 반응합니다. 뇌는 영양가 없는 정보, 가상 세계관의 정보, 의미 있는 정보를 구별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흡수합니다.
그렇게 스토리에 정신이 팔렸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분명 서사의 벽돌을 쌓던 중이었는데, 들고 있는 것은 스토리의 볏짚입니다. 벽돌집이 초가집이 되어 버립니다. 삶은 쉽게 흩어져버릴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스토리에 정신 팔려 삶이 서사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늑대의 바람에 무방비해집니다. (아기 돼지 삼형제)
한번 소비된 이야기들은, 그리고 우리의 삶이라는 이야기는 자칫 끝없이 밀려오는 이야기의 홍수에 휩쓸려 쉽게 잊힙니다. “우리의 지각은 파편화되고, 그에 따라 시간 역시 조각난다. 결국 삶이 쉽게 부스러진다.” 우리는 삶에서 건전하게 몰입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의 분산되지 않으며, 시간을 길게 가져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병철 선생은 행복은 손을 통해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정원을 가꾸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수작업을 통해 몸으로 직접 경험할 때 행복감이 깃든다는 것이죠. 땅의 느낌, 손의 감각 같은 것들. 이것이 바로 ‘존재의 굳건함(현존)’과 리추얼의 기반이 됩니다. 시간의 파편화에 저항하는 장치인 셈입니다.
우리는 “구글 어스에 발붙이고 정신은 구글 클라우드에 거주하며”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바뀌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져 수작업의 경험과 리추얼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늘 같은 장소에 정박해 있는 집, 항상 내 방에 머무르는 침대’처럼, 반복되는 리추얼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나 시시각각 놀라운 것을 제공하며 주의력을 빼앗는 스마트폰에서는 안정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규칙성 없는 변칙적인 것으로 일상을 가득 채워서는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영혼이 육체를 홀랑 빠져나가기 전, 지금 여기 땅에 발붙이고 있는 육체에 정신이 머무를 수 있도록, 리추얼이 필요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행할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리추얼은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시간을 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힘을 가집니다. 리추얼 행위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며, 삶에 몰입과 리듬을 부여합니다.
리추얼은 조급성의 시대, 산만함의 시대에 점차 중요해지는 머무름의 기술입니다. 이야기의 족쇄, ‘서사적 강제’에서 자유로워진 채 지금 여기에서 시간의 향기를 들이마셔야 합니다. “삶이 가속화된다는 느낌은 실제로는 방향 없이 날아가 버리는 시간에서 오는 감정이다.”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지면 시간은 파편화되고, 지속의 경험이 사라집니다.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극단적으로 무상해”집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사색적 삶, 머무름의 능력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삶과 시간, 그리고 세계를 모두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만큼 모두가 불안해하는 세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모두가 외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책 읽기, 불안을 말로 표현해 보기, 그리고 이야기로 써보는 것(그리고 위의 활동을 함께 나누고 소통하기)이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스토리 읽기의 치유력
고전 문학이나 이야기 속에는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꼭 같은 고민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등장인물의 힘겨움과 불안에 공감하며,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에 삶에 위로를 받거나 인생의 조언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삶의 무게를 떠받치는 것이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와 주변,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상 모든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살아왔던 것을 깨닫습니다. 이 사실이 위안이 되고 힘이 됩니다.
스토리텔링의 치유력
한나 아렌트는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으면 견딜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토리텔링으로써의 치유는 정신 치료에서도 효과적인 기법입니다. “심리적 불안은 막혀버린 이야기를 말로 풀어나갈 수 없을 때 생긴다. 치유는 우리가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 이야기는 치유력을 발휘한다.”
이야기 속에서 막힘이 있으면, 우리는 멈춰서게 됩니다.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보거나 글로 써봐야 합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당신 이야기의 등장인물의 불안은 어디서 왔는가?’, ‘그 불안을 떠듬떠듬 헤쳐나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겠는가?’ ‘그보다, 꼭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가?’ ‘해결이 아니라 해소를 필요로 하는 문제는 아닌가?’
“우리는 경청만으로도 남이 스스로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놓도록 지지해 줄 수 있다. 경청은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스스로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게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고, 심지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공명의 공간을 열어준다.”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적 스토리텔링(스토리셀링)이 아닌 함께,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의미 네트워크, 스토리를 공유하고 연대하며 함께 살아갑니다. 모두가 언제라도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앞을 향해 뻗어가는 무한한 반직선이니까요.) 이 세상에 우스운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의 이야기를 응원합니다.
* 저는 “웃기기는 해도 우습지는 않다”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 디지털은 세계를 수치화해서 구글 클라우드로 옮기며, 이곳에서는 (특히 자본주의와 함께)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들마저 숫자로 비교가 가능해집니다. 결코 비교될 수 없는 모든 것과 모든 것이 비교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영화나 드라마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과 영혼에도 평점을 매기려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일이 잘 풀리고 있지 않고 행복하지 않더라도, 존재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고, 미래가 불안하다 해도 괜찮다. 전혀 문제 없다. 살면서 절망과 허무에 부딪히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렇다면 절망에 흠뻑 빠지고 심연 속에 잠잠이 가라앉다가도 숨 쉬기 위해 어떻게든 밑바닥을 치고 올라와 헐떡이면 되지. 사람은 희망과 무기력을 되풀이하며 어떻게든 조금씩 나아가는 법이다. 그러니까, 살아만 있으면 다음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삶이 내게 무엇을 제공할지 전혀 모르는 와중에도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희망을 느낀다. 에리히 프롬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의미를 찾는 길 위에 있다. (길 위에서 종종 예상치 못한 기쁨을 만나곤 한다.) 그럼에도, 존재를 넘어서는 의미는 없다. 잘 살아 있다. 잘 숨 쉬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더없이 훌륭하다. 잘하고 있다. 다음이 마지막 숨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 모든 것이 삶이며, 실패한 인생이나 미완의 삶이란 없고, 삶의 방식에 우위는 없으니까 말이다. 존재가 곧 삶이다. 모두, 존재해 줘서 너무 고맙다.
- 송창연, <살아있다는 희망>
어떤 문학 작품은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 올려주지 않는다. 다만 더 깊은 곳까지 함께 추락해준다.
언제라도 나를 긍정해 준 것은, 나와 함께해준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그럼에도, 실수로 태어나버린 작은 희망을, 겉보기에만 아름다울 뿐인 희망이라도 차마 놓아버릴 수는 없어서.
선천적으로 음울한 기질에, 자신과 맞지 않는 세상에 피폐해져 글로 자신을 구원해보려 하지만, 지옥 불을 끄기에는 어림도 없는 한 컵의 물을 얻은 그는 절망 끝에 참으로 이상하고, 낯선 삶으로부터 탈출한다. 신기하게도 고작 그 물 한 컵이,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끝없이 넘쳐흐르는 생명수가 되고, 끝없이 넘실대는 바다가 된다.
사람은 꿈이 좌절되고, 바라던 인생을 손에 못 넣는다고 해도. 아니, 대폭으로 원하는 인생이 아니더라 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느끼거나 한다. 꿈이나 희망을 이루는 일보다, 그렇지 않고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살아가는 것 이전에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 후쿠모토 노부유키, <신 최강전설 쿠로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