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암만 모양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 드라마 <미지의 서울> -
우리는 흔히 ‘도망치는 것’을 비겁하거나 나약한 행위로 여깁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본능(fight or flight)에 따른 도피는 생존을 위한 지극히 합리적인 전략입니다. ‘큰 쥐, 작은 쥐 이론’에 따르면, 작은 쥐에게 승률 30%쯤은 담보해 줘야 작은 쥐가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큰 쥐에게 덤비며 게임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약자에게도 최소한의 가능성이 주어져야 계속 도전할 동기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승률이 나오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부딪치는 것이 매사에 정답이 아닌 것이죠.
도망가는 것 역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미세한 탈출 가능 신호조차 잡아내지 못한 동물은 그냥 포기하고 아무것도 안 하기에 이릅니다. 차라리 웅크리고 기다리며 에너지를 보존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정적 자극이 사라진 이후에도, 만성적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던 개체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각성과 동기 부여가 멈춥니다. 감정가 반응(좋고 나쁨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며 무감각과 무쾌감증에 이르게 됩니다(맥스 베넷, <지능의 기원>). 한국의 은둔 청년들이 생각나는 지점입니다.
최근, 13살 아이가 쓴 글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도망가는 것이 기본 생존 전략인데 왜 인간은 도망치면 혼나냐는 내용이었죠. ‘왜 혼나야 하는가?’라는 질문 속에는 사회가 개인에게 주입하는 특정한 가치와 규범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행동 양식을 가르치고 내면화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장, 책임, 도전, 끈기와 같은 가치들은 긍정적인 것으로 학습합니다. 반대로 도피, 회피, 포기는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거나, 비겁함과 연결하도록 배웁니다. 이러한 사회화와 연결 짓기는 사회의 지속적인 유지와 발전을 위해 개인의 노력을 독려하고,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한 행동을 유도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 특히 자본주의와 성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개인이 ‘더 나은 것’, ‘더 많은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자본주의는 신용을 바탕으로, 무한한 성장을 전제로 굴러가는 경제 체제기에 개개인의 안녕보다 사회 시스템의 유지가 더 강조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정체되거나 뒤처지는 것은 곧 실패로 간주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도망치는 것’은 부끄러움과 연결되고, 생산성 저하나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로 해석되어 사회 시스템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와 집단은 개인에게 ‘혼’을 내거나 비난함으로써 개인을 다시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낸 세금이 왜 저 잡놈을 위해 쓰이는 거야?’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합니다. [혼내기와 관련된 글을 부록에 첨부하고자 합니다.]
(한편, 토마 피케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능력주의는 승자들뿐만 아니라 패자들 사이에서도 성공에 대한 일정한 태도를 키워 우리를 분열시킵니다. 능력주의는 승자들에게는 오만을, 뒤처진 이들에게는 수치심을 키워주지요.” 운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일례로 뛰어난 운동 선수 중에 1, 2월 생이 많습니다. 11월, 12월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신체적인 우위를 점해서 눈에 더 잘 띄어 대회에 대표로 출전하며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실전 경험을 쌓은 덕이죠. 우리가 선택할 수 없었던 유전자나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운은 복리로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나’라는 것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길어진 문화적, 경제적 지렛대를 통해 엄청난 돌림힘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렛대를 직접 만들고 사용 기회를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잡았다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것이 타자가 준 선물입니다.)
드라마 대사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라는 메시지를 통해 사회가 주입하는 기존의 비겁함과 용기 개념을 뒤집어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극한의 스트레스나 압력 속에서 도망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회복하며, 궁극적으로 더 건강하게 생존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기 보존 행위입니다. 무조건적인 인내와 성장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과, 병리적인 사회 문화에 대한 미시적인 저항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정면 승부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것도 용기입니다. 사회는 개인의 다양한 생존 전략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전쟁터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들의 운명은 대부분 비극적이었으며 살아남는다고 해도 사회적 낙인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이 급박한 전쟁통이라 서로를 그렇게 (심지어 자살로까지) 몰아붙여야 하는가?”
크리스토프 코흐는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최소한의 도덕적 지위, 즉 존재하고 싶다는 욕망과 고통받지 않으려는 욕망을 가진다. 이것이 나의 도덕적 직관이다.”
+ 생존은 정언 명령이다. 생존의 대오에서 낙오한 자는 단순히 무능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열등하며 미적으로 아릅답지 않은 존재로 간주된다. (김홍중, <모더니스트 서바이벌리즘>)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회의 격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탈주가 필요합니다. 김홍중 교수는 <은둔기계>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 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 말하며 ‘은둔기계’ 개념과 함께 이를 설명합니다.
은둔은 사회적인 것, 지배적인 것, 패권적인 것으로부터의 필사적 탈주다. 은신처를 확보하지 못한 자들은 사회의 격류를 비껴 흘려보낼 생존의 각도를 갖고 있지 않다. 시대의 힘에 존재 전체가 적셔지고. 흐름에 휩쓸려, 시대가 붕괴할 때 함께 소실된다. 은둔기계는 세계를 강박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데, 이는 멋진 비판이나 논평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은둔기계에게 도주선은 은신처들을 연결하는 선이다. 도주의 시간을 결정하기 위해 그는 민첩한 초식동물처럼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때가 오면 달려야 한다. 더 은폐된 은둔지를 향해.
- 김홍중, <은둔기계>
‘나는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다’, ‘삶을 끝내고 싶다’는 말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안식보다는 일시 정지 버튼일 때가 많습니다. 언제라도 우리 안에는 ‘살고 싶은 나’가 있습니다. 새로운 상황과 환경, 그리고 혼란스러운 내적 상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갈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도망을 통해 시간을 벌 줄 알아야 합니다. 도망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망은 생존을 위한 전략이자, 자신을 보존하고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망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유려한 발재간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도망쳐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집요히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삶에 활기를 주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직선으로 도망치면 잡힌다. 도망칠 수 있는 유려한 발재간이 필요하다. 춤추듯 튀어라, 웃는 얼굴로 튀어라.
앙리 라보리는 그의 책에서 “사회적 행동을 지배하는 신경계의 근본 메커니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도피하라고, 도피만이 정상을 유지할 수 있는 생존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은 삶에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투쟁이나 도피를 택한다. 투쟁을 위한 공격 끝에 보상받으면 유효한 행동 방식으로 기록되고, 그렇지 못하면 다음에는 행동 억제 체계를 작동한다. 그런데 이런 공격이나 억제는 사회적 관계를 맺는 타인을 위협하거나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 도피는 생명체의 본성에 좀 더 부합하지만, 도피에도 여러 방식이 있다. 그는 특히, 상상계로 떠나 창의성을 발휘하는 도피에 방점을 찍는다. 이 도피야말로 뛰어난 적응 전략이고, 뒤로 하는 도피가 아닌 앞으로 하는 도피며,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더 효과적인 수단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항구적인 혁명이고, 도피를 예찬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 앙리 라보리, <도피 예찬> 옮긴이의 글
“현실은 멋대로 사라져주지 않아. 그리고 현실이 뭔지 모르면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지. 현실에서 눈을 감고 멈춰서는 것과 눈을 뜨고 도망치는 것은 큰 차이야.” “내 승리가 비현실적이라면 난 온 힘을 다해 현실로부터 도피할 거야. 현실 도피는 나에 대한 기대야.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자세지. 주변에서 어떤 정론, 통찰, 진리, 계몽을 내세우든 나는 나를 인정해. 그것이야말로 내 사명이자 일이자 살아가는 이유, 달리는 이유다. 잘 들어, 토가시. 왜 달리는지 이유를 알고 있으면, 현실 따위는 얼마든지 도피할 수 있어.” “나는 이 자리에서 도피로, 현실을 추월한다.”
- UOTO, 만화 <100M>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은신처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 은신처 속에 숨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 사회의 지배적 여론과 정동으로부터 집요하게 탈주하는 것, 과잉 연결된 관계들을 해체하는 것, 인간들의 세계를 떠나 비인간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과열된 자본주의적 삶의 형식을 벗어나는 것,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세계를 발명하는 것,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은둔의 실천이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은둔이란 파상(波像) 이후의 주체가 행할 수 있는 존재 방식 중 하나이다. 인간중심주의와 휴머니즘의 자명성이 파상된 폐허 속에서 인간은 은둔기계가 된다. (…) 꿈이 파상된 자리에서 천천히 작동하며 은신처를 만들어가는 오직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다.
- 김홍중, <은둔기계>
세계를 90도만 돌려서 보면, 사람들은 평소에는 말할 수 없는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눕는 것이 서는 것이고 서있는 것은 기어가는 것이란 점이다. (…)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기 전에는 탕핑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자세를 바꿀 이유가 없다.
- <탕핑주의자 선언>
아름다우면 이미 쓸모 있는 거잖아. 사랑받으면 이미 의미 있는 거잖아. 아름답고 사랑받는 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거잖아. 그래서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래.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고 싶으니까.
- 동구, <비밀수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