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불안과 스트레스

by 밈바이러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처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


+ 우리는 저마다 ‘목숨’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감정은 몸에서부터 출발한다

김주환 교수는 생각만으로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감정과 생각은 몸의 반응과 변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편도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신경 시스템은 위기 상황을 만났을 때 몸을 자동으로 준비시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빠지며, 근육이 긴장하는 등의 모든 신체적 변화는 외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생존 반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경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몸의 상태를 ‘감정’으로 해석합니다.


실제로 의식이 스스로 특정한 감정 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변연계가 특정한 흥분 상태에 돌입해서 신체의 변화가 생기고 약 0.5초 정도 지난 뒤라고 합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 몸이 먼저 반응한 후에 뇌가 이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이기에, 의식적인 생각만으로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김주환 교수는 감정은 몸이 주는 다양한 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 조절은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체 반응의 합리적인 근거를 찾습니다. 내 심장이 지금 왜 이렇게 두근거릴까? 맥락과 기억, 감각 등을 종합해서 신체적 반응의 원인을 추론하고, 그 신체 변화 및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정은 단순히 외부 자극에 대한 수동적인 반응이 아니라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구성해 가는 것입니다. 뇌와 몸은 끊임없이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감정이 구성되며, 우리는 내/외부 환경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한편, 김주환 교수는 리사 펠드먼 배럿의 말을 빌려 부정적인 감정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통념을 깨뜨립니다. 그에 따르면, 부정적 감정의 실체이자 근원은 단 하나이며, (긍정적인 감정은 실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유일한 감정의 본질은 바로 ‘두려움(불안감 혹은 공포)’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흔히 좌절감, 혐오감, 우울감, 분노 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감정은 두려움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파생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리사 펠드먼 배럿은 감정을 분류하고 개념화하는 방식은 대부분 일상적인 언어나 문화적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지, 과학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기본 감정’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과학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두려움의 변형으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복잡해 보이는 감정의 양상 뒤에 숨겨진 핵심 메커니즘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목숨’이라는 아주 커다란 약점을 가지게 됩니다. 불안과 공포가 모든 감정의 뿌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생명의 기본 원리: 항상성과 스트레스

아메바 수준의 생물도 주변을 감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더 잘 유지할 수 있는 곳을 향해 헤엄쳐 갑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생물은 자신의 몸에서 물질대사가 잘 이뤄지도록, 일정한 내부 환경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성 유지에 도움이 되는 환경을 찾아 나섭니다. (아메바가 본능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 때문에, 우리 몸은 체온, 칼륨 이온 농도, 혈당 수치 등을 관리합니다.


항상성은 내/외부 환경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센서, 감지된 변화에 맞춰 체내 환경을 조절하는 메커니즘,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서 균형 상태로 되돌리도록 하는 음성 피드백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이때 음성 피드백은 갈증, 배고픔, 졸림 등과 같이 현재의 항상성 균형이 깨지고 있음을 알리는 내부 신호이자 불쾌감을 유발하는 감각을 통칭합니다. 이러한 감각은 유기체가 불균형 상태를 인지하고, 해소하며 항상성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스트레스 역시 음의 피드백입니다. 항상성 균형이 위협받고 있다는 인지는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합니다. 이는 생물이 불안정한 상태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적응적 노력을 통해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어긋난 균열을 바로잡고 항상성을 재확립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에너지 소모가 수반되기도 합니다.


항상성 유지에 교란을 일으키는 내적 또는 외적 유해 요인들을 통칭해서 스트레서(Stressor)라고 하며, 스트레스는 바로 스트레서에 의해 항상성이 위협받을 때 나타나는 생체의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룩말은 사자를 만나면 심박수가 올라가고 근육을 긴장시킵니다. 교감 신경계가 급속도로 흥분되며 마구 도망가게 되죠. 이 과정에서 항상성이 깨지므로 사자는 스트레스 요인입니다. 하지만, 얼룩말은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에 걸리지 않습니다.


얼룩말의 편도체는 딱 사자를 만났을 때만 흥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얼룩말은 금세 부교감 신경이 우세한 상태로 돌아가 이완하며, 평온하게 풀을 뜯습니다.




알로스태시스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

생물 행동의 복잡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항상성을 넘어 알로스태시스의 개념까지 확장해야 합니다. 알로스태시스는 단순히 체내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넘어, 변화하는 환경에 선제적으로 반응하고 예측적으로 조절하는 동적인 과정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 전체를 동원해서, 미래의 수요를 예측하고, 미리 앞서 에너지를 슬금슬금 조절하는 식으로 변화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려 한다는 겁니다. 알로스태시스는 항상성보다 더 포괄적이고, 시간의 흐름까지 고려된 개념입니다.


동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다가올 것 같다고 예상되는 미래 즉 항상성이 깨질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미래 불안으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 이걸 알로스태시스 과부화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다음 순간을 능동적으로 추론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주 먼 미래까지 능동적으로 추론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스트레스 유발 요인이 없어도, 예상되는 미래 위협을 찾습니다. 그 미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한참 전부터 몸의 예측 및 조절 시스템을 가동하면,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과부하에 걸리게 됩니다.


김주환 교수에 따르면, “몸에 실제적인 손상이 없더라도, 몸이 현재 고통 속에 있다고 뇌가 추론할 때도 만성 통증이 발생하며 통증 경험이 물리적 현실만큼이나 뇌의 해석에 크게 의존”합니다. 일부 만성 통증은 뇌의 예측 시스템 오작동에서 비롯됩니다. 즉, 뇌가 과거에 아팠던 경험이나 부정적인 예측에 너무 집중해서 실제로 문제가 없거나 경미한 상황에서도 통증 신호를 과도하게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볼륨 조절 실패)


이런 만성 통증이 미래에 대한 만성 불안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상상 속의 미래에 괴로워합니다. 인간은 내일이라는 개념을 발명하더니, 년 단위의 먼 미래를 내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잠재적 위험을 동반하는 미래에 스트레스를 받아 특정 미래를 피하려는 것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 능력은 과잉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뇌의 과잉 작동

현대인들은 예전 같이 육체적 안녕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사자, 음식 조달)보다는, 사회심리적 스트레스(인간관계, 시험, 직장)에 더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뇌는 생존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위협과 사회심리학적 스트레스를 구분하는 데에 서툽니다.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 관여하는 뇌 부위는 크게 겹칩니다. (타이레놀 같은 진통제를 먹으면 인간관계에서 입은 상처가 완화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과거에 무리에서 배제되는 것은 곧 사형 선고였기 때문에, 사회 심리적 스트레스에 민감해야 했습니다. 사회 심리적 스트레스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생존의 핵심적 요소였습니다. 이 기조는 DNA에 각인되어 현재까지 유지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을 느낄 때 몸은 투쟁-도피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때의 뇌는 과거의 경험에 기반해, 무의식적으로 즉각적이고 원초적인 반응을 합니다. 사자가 나타났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틈이 없습니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뇌에 가야 할 피가 온몸의 근육으로 쏠립니다. 결국 이성적 판단이 힘들어지고, 자동 반사적인 행동이 우세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마주치는 문제 상황은 몸이 아니라 머리를 써서 해결해야하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이렇게 되면 우리의 행동이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더 악화시킬 여지가 생깁니다.


수많은 과제와 시험의 압박을 받을 때 뇌는 초원에서 사자를 마주친 것과 똑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말도 안 돼 보이지만, 뇌는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사고합니다. (시험 상황 → 제대로 해내지 않으면 낮은 학점을 받을 거야 → 낮은 학점을 받으면 나는 나의 쓸모를 잃어버리고 집단에서 낮은 지위를 받거나 배척당할 거야 → 그럼 나 죽는데!)


인간관계, 경제적 상황, 문화적 요소 등 다양한 것들과 얽혀 있는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는 뇌가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복잡하고 추상적입니다. 뇌는 사회심리학적 위협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마치 사자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일단 경보를 울리고 봅니다. (비상이야! 빨리 투쟁-도피 모드에 돌입해, 이거 빠르게 처리 안 하면 난 분명 죽은 목숨이야) 그래서 이성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사회심리적 스트레스는 목숨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스트레스 상황에 직면했을 때, 괜히 불쌍하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야 합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업무의 생산성에 심각한 해가 됩니다. 심호흡을 해서 뇌의 비상 경보를 잠재우고(편도체 안정화) 한 번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합니다.


+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생명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됐기 때문입니다.


한편, 장기적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우리 뇌는 위험한 세상이 찾아왔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우울감을 통해 움직임을 줄이고 면역 반응을 높이는 등의 방식으로 뇌는 수동적인 모드가 되어 몸을 사리게 만들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어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그런데, 역으로 우리가 몸을 안 움직이면 뇌는 세상이 위험한 곳으로 바뀌었나 싶어서 우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세계는 더 없이 안전한 곳이니. 움직여야 합니다. 안데르스 한센은 “운동을 통해 건강한 몸을 갖추게 되면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원래라면 보이지 않는 사자에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지만, 운동을 해서 건강한 몸을 갖추게 되면 사자가 주변 100m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어 어느정도의 여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뇌는 본디 움직임을 위한 기관입니다! (움직일 필요가 없어진 멍게 성체는 자신의 뇌를 먹어버립니다.)


+ 불안과 스트레스 그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이 두 요소는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시험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아무도 시험 공부를 하지 않을 겁니다.) 편도체는 한 번 덜 울리기보다 한 번 더 울리는 쪽으로 진화됐습니다. 아무리 100번 잘 울렸다고 해도, 어느날 1번 덜 울렸다가, 정말 위험한 상황에서 방심하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발표나 시험을 앞두고, 침이 마르고 속이 안 좋은 경험이 있다면, 스트레스에 직면해 긴장한 뇌가 소화작용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안전한 세상, 예상되는 위험을 찾아 벌충하려는 뇌

Q. 세상은 더 진보하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일까?

A. 부유하고 안전한 곳에 살수록 자살을 선택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 마크 맨슨, <희망 버리기 기술>


우리는 제법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 수렵 채집 시대나 농경 시대에 비해 맹수에게 잡아먹히거나,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갑자기 사망할 위험이 현저히 낮아지는 등 물리적인 안전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뇌의 위험 감지 시스템과 고통 회로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뇌는 물리적인 위협이 줄어든 환경에서 남는 에너지를 정신적, 심리적인 위협이나 고통을 찾아내고 증폭시키는 데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뇌가 ‘위험이 사라졌으니 다른 위험이라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숨은 위협 찾기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 인해 생존 시스템은 주변의 구체적인 물리적 위험 대신, 미래의 가상적인 위험을 탐색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생존에 직결되지 않는 사소한 불편함은 무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소한 불편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를 큰 고통으로 느끼는 경향을 보입니다. 타인의 시선, 사회적 평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작은 갈등이 실제보다 더 큰 위협으로 느껴져 심리적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당장 눈앞에 물리적 위험은 없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잠재적인 실패에 대해 과도하게 불안해하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많은 고통은 객관적인 위험 때문이 아니라, 안전해진 환경에서 뇌가 과잉해서 만들어내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주변의 눈치를 보고, 미래를 과도하게 예측하며, 자신과 삶을 과잉 교정하려는 경향도 여기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공포는 전염됩니다. 모두가 미래에 벌벌 떨고 있는데 나만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을 나만 두려워하지 않기란 참 어렵습니다. (모두가 믿는 것을 믿지 않기 참 어렵죠.)


‘유병률 유도 개념 변화’ 실험이 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다양한 얼굴 이미지를 보여주고, 위협적인 얼굴과 위협적이지 않은 얼굴을 구분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실험 초기에는 실제로 위협적인 얼굴 이미지가 자주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분명히 위협적인 얼굴들만 ‘위협적이다’라고 정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실험이 진행되면서 위협적인 얼굴 이미지의 빈도가 점차 줄어들자, 참가자들은 이전에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모호하거나 중립적인 얼굴 이미지들까지도 ‘위협적이다’라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판단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의 상대적인 빈도에 의해 끊임없이 재조정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위협적이다’라는 개념 자체가 환경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확장된 것이지요. 특정 유형의 문제가 줄어들면, 우리는 더 미묘하거나 덜 심각한 경우까지도 그 문제의 범주에 포함시켜 인식하게 됩니다.

혈중 도파민 농도가 높아진 상태에서나 목숨이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임의적인 점들에서 패턴을 더 많이 찾아(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독을 조장하는 사회에서 높아진 도파민 수준과 함께, 왠지 모를 불안에 미래를 내다보며 잠재 위험 패턴을 더 많이 찾아(만들어)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지.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




편도체*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정서, 두려움과 초조함과 관련된 뇌의 영역입니다. (공격성과 강하게 연결된 것도 편도체입니다.) 한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뇌 스캐너에 누은 채로, 유령에게 쫓기는 팩맨 게임을 하도록 했습니다. “피험자들이 유령에게 붙잡힐 때 피험자들에게 쇼크를 가했는데, 피험자들이 유령을 피하려 애쓰는 동안에는 편도체가 잠잠했지만, 유령이 다가오면 편도체의 활동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쇼크가 강할수록 유령이 팩맨에게 더 멀리 있어도 편도체가 활성화됐고, 활성화 수준이 더 높았고 자가 보고된 공황 감정이 심했습니다.”


다른 연구에서 피험자들은 언제 쇼크를 받을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위적으로 쇼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측성과 통제력의 결핍이 싫었던 까닭에, 많은 피험자들은 더 강한 쇼크라도 좋으니 차라리 즉시 쇼크를 받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편도체는 사회적 불확실성과도 연결됩니다. “피험자들에게 순위가 정해지는 경쟁 게임을 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연구자들은 게임 결과를 조작해서, 피험자들의 순위를 안정되게 하거나, 정신 없이 오르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피험자들의 순위가 불안정할 때, 편도체가 활성화됐습니다. 내 위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 불안한 일인 겁니다.”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불확실과 불안정은 가장 치명적인 스트레스 요소입니다.)


또한, 편도체는 사회적 순응과도 연결됩니다. 피험자에게 A를 보여주고, 잠시 후에 A와 B 중 무엇을 봤냐고 물어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B라고 답할 때, (다른 사람은 모두 연구자와 공모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대부분의 피험자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B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신념을 갖고 A라고 대답한 일부 피험자들의 경우, 편도체가 활성화됐습니다. 한편, 쥐의 편도체에서 특정 회로를 활성화하면, 불안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고, 또 다른 회로를 활성화하면 안전한 환경과 불안한 환경을 구별하는 능력을 잃습니다.


편도체는 선천적 공포와 학습된 공포를 중재합니다. “선천적 공포”는 말 그대로 무엇을 무서워하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통해 학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파블로프의 개와 종소리처럼, 특정 자극을 통해 공포 반응을 학습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기 전에, 특정 소리를 들려주면, 이제 쥐는 소리만 들어도 공포 반응을 일으킵니다. (공포의 조건화)


반대로 공포 소거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언가를 무서워하기를 그칠 때 편도체 뉴런들이 습득했던 흥분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학습합니다. “이제 저 소리가 더는 무섭지 않아.” 공포 소거는 흥분성 뉴런을 억제하는 뉴런을 활성화하면서 일어납니다. (이때, 편도체는 전두피질의 신호 입력을 받는다고 합니다.)


* 로버트 새폴스키, <행동> p.45~50의 실험 내용들의 재인용입니다.



조셉 캄포스의 시각적 절벽 실험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기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이 실험은 겉보기에는 아찔한 절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튼튼하고 투명한 유리판으로 덮여있어 안전한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아기들은 마치 절벽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때, 부모는 절벽 반대편에 서서 아기를 부르며 두 가지 상반된 표정을 짓습니다.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아기는 유리판 위를 용감하게 기어 건너갑니다. 반대로 엄마가 두려워하거나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 아기는 멈칫하거나 뒤로 물러서며 건너가기를 주저합니다.


이 실험의 핵심은, 같은 상황에서도 아기가 부모의 감정적 신호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입니다. 아기는 자신이 직접 환경을 판단하기보다, 주변 사람, 특히 보호자의 반응을 통해 세상의 의미를 구성하고 위험 여부를 판단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즉, 세상이 안전한지 위험한지는 전적으로 아기 혼자의 판단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막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의 무엇에 주의 집중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아이는 부모와 ‘관심 공유’를 하며 주변의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무시할만한 것인지 배우고 세계관을 구축해갑니다.)




스트레스가 낳는 사회적 병리: 공격, 분열, 불신

스트레스를 받는 쥐가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른 (만만한) 쥐를 무는 것입니다. 이를 스트레스성 전위 공격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스트레스성 전위 공격을 끝내주게 잘합니다. 경제 침체기에 배우자 및 아동 학대 발생률이 높아진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집요하게 물어뜯습니다. (인터넷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안전한 곳에 숨어서 일방적으로 남들을 물어뜯을 수 있는 스트레스 발산처입니다. 저는 악플을 ‘살상 드론을 통한 원격 폭격’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편을 가릅니다. 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집단과 나의 정체성과 반대되는 집단. 내 이익을 보장해 주는 집단과 나에게 해가 되는 집단.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릅니다. 만약 자신이 뜻한 대로 되지 않고, 만족할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유발되고, 집단 간에 스트레스성 전위 공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스트레스성 전위 공격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더욱 강렬하게 분열시킵니다. 심지어 스트레스 상황은 이타성과 외집단에 대한 공감 능력까지 낮춥니다. 개인의 스트레스는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 심각한 병리 현상을 초래합니다. 나를 한번 공격했던 사람을 어떻게 진정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서로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면 결국 개인과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납니다. 후쿠야마 교수는 “지속 성장을 달성한 국가는 신뢰 자본이 풍부한 국가”라고 합니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각종 계약·거래와 관련한 불신 비용이 적어 효율이 높아진다는 설명입니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나 서로에게 믿음을 갖고 사회/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면, 다양한 거래에서 나타나는 비용이 줄어들고 예상치 못한 손해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도 감소합니다.


반면 신뢰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위험 회피 비용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나게 되면, 개인의 부담이 늘고, 이는 곧 스트레스로 이어집니다. 스트레스는 다시 공격성을 낳고, 분열을 낳고, 불신을 낳고,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켜 다시 스트레스가 증가합니다. 악순환입니다. 박권일 사회학자는 분노가 잘 조절된 사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동감하며, 그러기 위해 우선 불필요한 영역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함께 줄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다

한때 전쟁터에서 날아오는 총탄을 막기 위해 무거운 방탄조끼를 입었습니다. 몸의 어디에 총알이 박힐지 모르니 모든 영역이 두터울 수밖에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방탄조끼를 입기는 하는데, 그 무게가 상당히 부담됩니다. 지금은 신축성이 있는 신소재 슈트를 입는다고 합니다. 한 곳에 총알이 날라와 박히면 다른 모든 영역에서 함께 탄성력이 작용해 해 충격을 흡수하고 완화해 주기 때문에 가볍지만, 효과는 제대로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그때그때 보완해 줄 수 있으면 각자가 불필요한 문제를 떠안지 않고 더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일 때 혼자 쩔쩔매고, 혼자 헤쳐나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용기 있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기꺼이 손 내밀어 주는 사회. 자신의 문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유해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 방탄 조끼와 신축성 슈트의 비유는 <에르고드 이코노미>, 권오상에서 따왔습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0화9. 고통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