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책임의 생성

by 밈바이러스

고쿠분 고이치로는 <책임의 생성: 중동태와 당사자 연구>에서 수많은 행위(선택)들이 (의식 없이) 내려지다가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의지라는 개념이 나타나 그 행위(선택)를 덮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의지-선택-책임이라는 선형적인 인과에 의해 상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보통 별생각 없이 일상을 영위하지만, 갑자기 헛디뎌서 발을 삐기도 하고, 물건을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나서, 비로소 ‘아차!’하기도 합니다.




중동태: 책임의 생성

고쿠분 고이치로는 현대 언어에서 동사는 ‘주체가 행하는 능동태’와 ‘당하는 수동태’로 나뉘며, ‘이 행위는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면서 행위의 모든 책임과 의도를 주체에게 부여하는 서구 철학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에는 능동태와 대립하던 것이 수동태가 아니라, ‘중동태’였다고 말합니다. 중동태는 수동태의 원형이었으나 수동태에 밀려서 사라진 독특한 문법 형식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언어가 ‘능동태-수동태’의 ‘했다-당했다’의 이분법적인 체계라면, ‘능동태과 중동태’의 대립은 ‘주어가 과정의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랑에 빠졌다’라는 문장을 살펴 봅시다. 제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사랑할 대상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나의 몸’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 장소를 내어준 걸까요? 그저, 나와 너 사이의 사랑이라는 별수 없는 현상이자 과정의 안에 ‘내’가 포함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즉, 중동태의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가 되는 과정이며, 주어가 그 과정의 내부에 있습니다. 과정과 흐름에 주어가 포함되고 연루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반대로 능동태의 동사는 주어에서 출발해서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입니다. 능동태와 중동태가 대립하던 시절에는 능동태의 주체 역시 소홀히 여겨졌습니다.

인도 유럽에서 ‘살아가다’는 ‘흐르다’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관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과정입니다. 중동태와 능동태의 대립은 주어가 과정의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의지’는 문제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중동태는 주어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능동태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행위가 주어에게 ‘일어나는 것’ 또는 주어가 행위에 ‘연루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통로를 열어줍니다. 행위가 주어의 전적인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 상황, 본능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주어에게 ‘발생’한다는 겁니다.

전 장에서 살펴봤던, ‘왜 혼나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중동태적 사고의 갈증에서 비롯됩니다. ‘도망쳤다’는 행위를 단순한 타동사적 ‘의도적 도피’로 봐서 책임을 묻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불가피한 ‘자신에게 일어난’ 행위(자동사/중동태의 맥락)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사자를 피해 ‘도망쳐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쿠분은 중동태가 ‘자유의지’와 ‘책임’이라는 현대 철학의 핵심 개념을 재고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한 완전한 주체이자 책임자인가? 아니면 어떤 행위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는 그저 그러한 발생에 연루되는 존재인가’.


언어는 우리의 사고의 틀과 가능성을 규정합니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능동과 수동의 대립 이전에, 모든 언어의 원형에는 중동태가 있었다는 가설을 세웁니다. 행위의 ‘주체’보다 ‘사건으로서의 행위’ 그러니까 현상 그 자체가 먼저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비가 오다’라는 것을 ‘비’와 ‘내리다’ 이렇게 명사와 동사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사건이자 현상으로 인식했다는 겁니다.


즉, 사건에 명사와 동사를 분리해서 주어에 동사의 책임을 묻고 자유의지를 부여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중동태의 장이 되어, 배경으로 물러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실상은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우리가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행위자라기보다는 배경이나 우주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스피노자는 이 세계에 바깥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동태의 세계입니다.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 역시 전체로서의 우주를 이야기합니다.**


+ 줄리언 제인스에 따르면, 고대인은 자신의 마음에 대한 메타인지가 부족해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조현병 환자와 유사하게 세상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아직 밈을 선택하고 관리하지 못하는 그저 밈을 실어나르는 기계로서, ‘신’의 목소리나 환각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라는 겁니다.


* 동사와 비-주체적 행위

자동사: 주어의 동작이나 상태가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체로 완결되는 동사. 예) “아이가 잔다.”, “시간이 흐른다.”, “내가 도망치다.”

자동사는 목적어를 필요로 하며, 목적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타동사와 달리, 주체의 행위가 외부 대상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주어 자신에게 집중되거나 주어의 상태 변화를 나타냅니다. 고쿠분은 이를 중동태와 가까운 맥락에서 해석합니다. 자동사적 행위는 때로 주어의 의도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에게 ‘일어나는’ 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도망치다”는 언뜻 주체의 능동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본능적이고 자기 보존적인 반응으로 주체에게 ‘일어나는’ 일에 가깝습니다. 사자가 오니 사슴이 도망치듯, 주어의 내적인 작용이나 외부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행위가 발생하는(happening) 것에 가깝습니다. 이는 타동사처럼 외부 대상을 ‘지배’하거나 ‘변화’시키는 의도적 행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 데이비드 봄은 ‘레오모드’라는 언어의 사용을 제안합니다. 레오모드는 ‘흐름(rheo)’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따온 말로, 명사 중심의 언어가 아닌 동사 중심의 새로운 언어 사용 방식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명사(정지된 ‘사물’이나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과정’과 ‘흐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입니다.







면책함으로써 인책하기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일상 생활을 하다가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깨트리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아차 싶습니다. 한 철학자는 사건에 선행해서 주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은 개체를 발생시키는 생성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쿠분 고이치로에 따르면, 능동과 수동을 분명히 구별하고 주체에게 책임을 부가하는 것은 ‘심문하는 언어’입니다(“네 의지로 한 거 아니야?”, “네가 선택한 거 아니야?”). 그는 행위 주체의 자유의지를 심문하지 않는 중동태적 관점을 통해 기존의 책임 개념, 즉 심판과 자책의 언어에서 벗어나, 인책(引責)과 책임의 언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외부의 심판이나 자책에 의한 책임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를 자신의 삶 속에서 받아들이고 (기꺼이) 책임져야(또는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쿠분의 당사자 연구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단 개인에게 책임을 물리고 심판하기 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마치 자연 현상처럼 보고, 우선 ‘면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이 방화를 저질렀다면, 그것을 우선 방화 사건이 아니라 ‘방화 현상’이라고 외재화하고, 그 행동의 메커니즘을 탐색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도록 오픈 다이얼로그 과정을 거칩니다.


반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방화범은 오히려, 당신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었다는 말에 울면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이런 ‘면책함으로서 인책하기’라는 역설적인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책임질 수 있는 주체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와 적대적 생성 신경망(GAN)

언어의 진화를 알면 인간 사고의 흐름과 생각의 진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우리의 마음을 조각하고 건축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폈듯이 사건과 주체의 구분이 흐릿하거나, 힘이 비실비실했던 초기 언어가 능동-수동이 강하게 대립하는 주체적인 언어로 진화했습니다. 중동태가 언어 속에서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우주의 흐름상 그러려니 하는 것보다 너를 탓하고 나를 탓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물리고, 책임을 갖고, 상벌을 내리는 쪽으로 문화 진화의 선택압이 작용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이 우리가 지구라는 환경을 더 빨리 장악하고 통제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아와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생하고 확고해졌는지 추측해 보자면 ‘적대적 생성 신경망(GAN)’의 작동 방식이 단서가 될지도 모릅니다. GAN은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생성할 때 사용되는 기술로, ‘생성자’와 ‘판별자’라는 두 개의 신경망이 서로 경쟁하며 발전합니다. 생성자는 가짜 이미지를 만들고, 판별자는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합니다. 판별자가 더 잘 판별할수록 생성자는 더 진짜 같은 이미지를 만들려 노력하고, 생성자가 더 진짜 같은 이미지를 만들수록 판별자는 더 정교하게 판별하려 노력하며 서로의 성능을 향상시킵니다.


GAN의 원리를 ‘자아’와 ‘자유의지’의 발생 과정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위조지폐범과 경찰의 끝없는 전략 싸움과 추격전이 떠오릅니다.


생성자: 위조지폐범 = ‘나’라는 자아(기자)

‘나’라는 기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럴듯한 이유와 설명을 생성합니다. 왜 내가 그렇게 행동했는지, 어떤 의도로 그 일을 했는지, 자신을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보이게 하는 이야기를 만듭니다.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사회는 그 사람을 문제아, 심지어는 범죄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결과는 (사회적 지위와 자원을 위해서) 자신의 공으로 돌리며, 사고가 났을 때 무고한 책임을 피하거나, (자신이 연루됐다면) 책임을 덜기 위한 변명을 만듭니다.


판별자: 경찰 = 사회 / 타인

사회(또는 타인)는 ‘나’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고 여러 질문을 던지며 진실을 가려냅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현장에 ‘내’가 있었으면 책임을 물리려고 합니다. 또, 우리는 팀 프로젝트의 성과에 있어서 자신의 공을 실제보다 더 높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사회는 그 이야기를 파고들어 책임 소재를 더 명확히 하고, 거짓을 가려내려 합니다. 그 공을 빼앗으려고 하기도 하지요.


책임지기, 공로 뺏기, 그리고 책임 회피, 책임 물리기의 복잡하고 적대적인 게임 속에서 자유의지와 자아, 그리고 주체 개념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정교해진 것입니다. 결국, ‘자아’와 ‘자유의지’라는 굳건한 개념은 인간이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책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서로의 행동을 예측하며 통제하기 위해 발전시킨 고도로 정교한 ‘이야기 생성 및 판별 시스템’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게임에 수반된 단어와 문법 체계, 설득력, 논리력, 이해력이 함께 진화했습니다. 한편, 니체 역시 자유의지를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자유의지와 책임이 우리의 원한 감정(르상티망)에서 비롯된 분풀이라고 주장합니다.



+ TV에서 유치원 꼬마 둘이 할머니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내가 (심부름) 다 했잖아!”, “나도 도왔잖아!(실제로는 안 도움)” 그런데 혼자 다한 친구가 “네가 뭘 도왔다고 그래!”하니 다른 친구가 삐져버립니다. 친구를 달래주고 싶었던 착한 꼬마는 초콜릿 과자를 나눠주면서 삐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삐졌던 친구가 “미안해, 다음에는 나도 진짜 도와줄게.” 이렇게 화해하더랍니다.


우리는 사는가, 살아지는가?
‘산다’는 것 자체가
중동태적인 과정인 것이다.
- <장애학의 도전>, 김도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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