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할지를 고를 수는 없는 법이다
- 쇼펜하우어 -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 유발 하라리 -
‘나’라는 자아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한다는 느낌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생생합니다. 하지만 신경과학은 이 강력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벤자민 리벳의 자유의지 실험입니다.
리벳의 실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우선, 참가자들이 버튼을 누르고 싶어졌을 때, 자유롭게 버튼을 누르도록 합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을 정확히 기록하도록 합니다. 연구자들은 다음의 세 가지를 동시에 측정했습니다.
1. 뇌 활동: 손가락을 움직일 준비를 하는 뇌의 신호 (준비 전위)
2. 의식적 결정의 시점: 참가자가 ‘움직여야지’ 마음 먹은 순간
3. 실제 움직임: 버튼이 눌린 순간
실험 결과는 놀랍습니다. 실험 참가자가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의식적으로 마음 먹기 전에, 뇌가 0.35초 정도 먼저 움직일 준비를 끝냈다는 겁니다.
전통적인 해석: ‘자유의지는 환상인가?’
리벳의 실험 결과를 접한 많은 사람이 ‘내가 자유의지로 결정해서 행동한다’는 직관적인 믿음이 강하게 흔들렸다고 합니다. 즉, 뇌는 의식보다 먼저 행동을 계획하고 준비했으며, 우리는 그 후에 ‘내가 결정했다’고 의식하게 되는 셈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형태는 아니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제 해석: ‘자아 구성’ 실험으로서의 리벳 실험
제가 이 책에서 이야기해 왔던 것에 의하면 실험 결과가 그다지 놀랍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뇌는 사용자가 원할 때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미리 손가락이 움직일 준비를 합니다(준비 전위 발생). 그리고 사용자가 버튼을 누릅니다. 이때 “버튼을 누른 건 바로 나야”라고 말하는 자아 혹은 캐릭터는 약간 늦게 구성되는 것입니다(자아 구성). 여기서 데닛의 다중 원고 이론을 참고하면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해볼 수 있습니다.
데닛이 본 리벳 실험
1. 뇌의 준비 단계: 행동 초안들의 경쟁
뇌는 다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수많은 ‘행동 초안’을 만들고, 수정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는 중 특정 행동 초안(손가락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준비 전위가 발생합니다. 준비 전위는 ‘사용자’가 특정한 시점에 명확히 선택하거나 의식적인 결정을 완료했다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신경 활동들이 병렬적으로 경쟁하며 특정 행동이 발현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2. 의식의 ‘방송’과 “내가 했어요!”하는 ‘자아’의 등장
데닛에게, 우리가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의식적으로 마음먹는 순간은, 수많은 초안들 중에서 하나의 ‘행동 초안’이 뇌의 ‘광역 뉴런 작업 공간’에 ‘방송(broadcast)’되는 순간입니다. 이 ‘방송’은 뇌의 여러 영역에 널리 퍼져나가고, 다른 인지 과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행동한다’는 ‘나’라는 캐릭터가 의식적인 서사에 편입됩니다. 그렇게 ‘나’라는 캐릭터는 버튼을 누르는 행동에 대한 주인공이자 ‘작자(author)’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데닛이 말하는 작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뇌는 기본적으로 이야기꾼이고 작가입니다. 그런데 왜 뇌는 굳이 ‘나’라는 캐릭터에게 다시금 작자(저자)의 권위를 부여하는 걸까요? 작자에도 두 가지 층위가 있는 것입니다.
* 데닛은 제가 말해온 ‘나’와 구분되는 별도의 사용자라는 개념을 거부합니다. 데닛에 따르면 ‘사용자’가 ‘의식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느끼는 것은, 분산된 신경 과정들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나 ‘서술’로 통합되고 구성되면서 비로소 의식적으로 인지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데닛에게는 ‘사용자’ 역시 ‘나’입니다. 이에 대해서 저도 동의하며, 뒤에 이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자’의 역할은 두 층위로 나뉩니다. 이것은 두 명의 독립된 작가가 있다는 이원론적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뇌)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저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뇌’로서의 작가(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작가):
뇌는 끊임없이 정보를 처리하고, 다양한 원고를 동시다발적으로 생성하고 편집합니다. 이 원고들은 기억, 지각, 감각 행동 초안 등 온갖 형태의 정보가 될 수 있습니다. 뇌는 글쓰기의 메커니즘과 실행을 담당하는 실제 작가이며, 물리적, 생화학적, 신경학적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을 써내려가는 궁극적인 주체입니다.
‘나’라는 작가(인터페이스로서의 작가):
뇌의 수많은 원고들을 ‘내러티브 중심의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통해 통합하며,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처럼 느껴지도록 구성합니다. 이로써 ‘내’가 했다는 의식적 경험이 형성됩니다. 이때 자기 행동에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나’라는 기능적인 작자가 구성됩니다. 뉴런 하나하나가 ‘책임’이라는 개념을 알 수 없지만, ‘나’라는 UI는 뇌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책임을 구성하며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또, 미래를 계획하거나 메타인지의 핵심 기제가 됩니다. 뇌가 이 ‘나’라는 캐릭터를 UI에 띄우는 것은 기능적입니다. 뇌의 병렬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 속에서 ‘나’라는 통합된 자아를 형성함으로써 혼란을 줄이고, 복잡한 세상과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는 UI 덕분에 우리는 일관된 ‘나’로서 세상을 인지하고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뇌의 고차원적 작용이자 기능으로, 뇌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뇌라는 시스템의 다른 층위에서 발현되는 현상입니다. ‘나’라는 인터페이스는 물리적 실체가 아니며, ‘가상’입니다. 물리적으로 특정 장소에 딱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가상입니다. 하지만 실제 행동을 유발하고 사회적 규칙 속에서 기능하게 만드는 강력하고 실체적인 영향력을 가집니다. (마치 컴퓨터 바탕화면의 폴더 아이콘이 실제로는 복잡한 비트와 바이트의 배열이지만, 사용자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시각적 형태로 제공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콘은 실제로 존재하며 작동하지만, 우리가 보고 경험하며 활용하는 시각적 이미지 뒤에는 숨겨진 기능과 과정이 있습니다.)
‘나’라는 인터페이스는 뇌가 자신의 복잡한 활동을 통합, 요약, 의미 부여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고차원적 인지 활동을 수행하도록 돕는 필수적이고 기능적인 ‘실체적 현상’입니다. 뇌가 ‘나’라는 캐릭터를 거쳐 만들어내는 의도와 실제 행동,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뇌에 되먹임됩니다. 패턴 분석과 정보 운용도 철저하게 ‘나’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우리 삶의 공동 저자이자 행동가, 그리고 마케팅부로서 뇌가 더 많은 것들을 해내면서도 자신을 더 적응력 있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뇌는 단순히 전기 펄스 수준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뇌에서 생성된 다양한 활동의 초안들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비로소 구체화되고 공론화됩니다. 이 언어화된 초안들을 자신에게 서술해 보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생각은 더욱 정교하게 조정되고 다듬어집니다.
데닛의 관점에서 이러한 언어적 상호작용은 개별 뇌의 ‘경계’를 넘어선 광범위한 정보 교환의 장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이야기를 함께 써가며 의미를 구성하고, ‘공통의 이해’를 형성합니다. 의식 자체가 ‘사적인 극장’* 속에서 독립적인 사용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정보가 ‘대중적으로 표출되고 처리’되도록 진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뇌의 ‘나’라는 인터페이스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인터페이스인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인터페이스를 아주 잘 사용하며 사회를 구성합니다.
* 데닛이 비판하는 ‘데카르트 극장(Cartesian Theater)’은 뇌 속 어딘가에 모든 감각 정보가 모여 의식적 경험으로 통합되고, ‘나’라는 주체가 이를 관람하거나 최종 결정을 내리는 중심적인 장소가 존재한다는 서구 철학의 뿌리 깊은 직관적 착각을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데닛은 이러한 중심적 제어점이나 관찰자의 존재를 부정하며, 의식을 뇌의 분산된 정보 처리 과정의 총합이자 그 결과물로 설명합니다.
대니얼 데닛은 우리 자신이 ‘신경 회로의 일부’가 아니라 ‘운영 체제의 최종 사용자(end-user)’에 더 가깝다고 비유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용자’는 다름 아닌 ‘인터페이스로서의 나’를 의미합니다.
‘사용자’란 UI를 통해 복잡한 세상을 조작하는 UI의 경험자이자 기능하는 주체입니다. 사실 ‘나’ 밖에 있는 별도의 사용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가 곧 사용자입니다. 우리가 ‘나’라는 앱 또는 인터페이스가 되어 세상과 상호작용하고 경험하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바로 사용자로서의 자신인 것이죠. 지금까지 제가 ‘나’와 사용자를 구별해왔지만, 사용자 역시 또 하나의 ‘나’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용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속의 특정 앱처럼 그 자체로 실행되면서 세상을 경험하고 기능하는 존재인 겁니다. 앱을 쓰는 다른 사람(사용자, 혹은 호문클루스)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나’라는 앱의 작동이 바로 사용자 자신인 겁니다. 이제, 미루고 미뤄왔던, 인터페이스와 ‘사용자’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 벤자민 리벳 실험의 새로운 해석은 “적어도 우리는 멈출 자유가 있다”입니다. 하지만 억제 역시 ‘실행’만큼이나 생물학입니다. 수많은 실행의 기제는 “억제의 억제(탈억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의지, 그릿, 노력 이런 것도 영혼 같은 초자연적인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물학의 산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