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용자의 정체

그리고 자유

by 밈바이러스

우리는 일상적으로 당연히 ‘나’는 ‘나’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시점에서 ‘나’는 뇌가 만들어내는 캐릭터에 불과하며 구상물에 가깝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뇌가 ‘나’를 만들어 내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우리는 ‘사용자’라고 말했습니다.




사용자는 따로 없다

뇌와 ‘나’의 관계를 알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나는 뇌와 ‘나’ 사이의 어느 틈새에 있는 관찰자이며 사용자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잠시 게임에 몰입하는 초등학생을 상상해 봅시다. 초등학생은 이윽고 자신이 플레이어임을 잊고, 캐릭터의 움직임에 맞게 몸을 움찔거리며 게임 캐릭터와 몰아일체 상태가 됩니다.


현실의 플레이어는 투명해져서 마치 사라진 것과도 같습니다. (자고 있는 아이는 주체가 아닌 그저 잠이라는 현상에 연루된 객체에 가까운 것과 같습니다.) “뇌라는 컴퓨터” 밖에 있는 사용자는 어느새 자신이 사용자라는 것을 다시 잊고 ‘나’라는 게임 캐릭터에 몰입하게 됩니다. 잠시만요. 애초에 처음부터 뇌라는 게임기 밖에 플레이어(사용자)는 없었던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사용자라는 개념은 과학적 이미지와 현시적(일상적인) 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만들었던 또 하나의 ‘나’이며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게임 밖에 따로 존재하는 ‘플레이어’나 ‘영혼’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뇌라는 ‘게임기’는 자기 스스로 ‘나’라는 캐릭터를 생성하고, (실제 몸과 함께) 그 캐릭터를 움직이며, 실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메커니즘(알고리즘)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뇌는 게임 캐릭터를 만들어서 어떤 사용자(뇌 안의 관찰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캐릭터를 만들고, 활용하고 플레이하는 것은 뇌 자신입니다. (캐릭터가 걸을 때, 실제로 걷기가 실행되니까 캐릭터는 자신이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고하기 쉽습니다. 기자로서의 ‘나’를 기억하시나요? 하지만 틀리지도 않은 것이, 뇌의 한 기능적인 층위가 ‘나’니까요.)


뇌는 ‘나’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캐릭터와 함께 (혹은 캐릭터로서) 뇌 자신을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은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것을 잊고 게임에 몰입했습니다. 뇌라는 플레이어도 캐릭터로서 세상에 몰입합니다. 뇌는 그렇게 세상을 인지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행동합니다. 즉, 뇌는 ‘나’라는 UI를 활용하여 스스로 자신의 모든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자신을 관리하며, 그 과정에서 ‘나’를 확장해가는 것입니다.




뇌와 ‘나’: 다른 층위의 동일한 실체

뇌는 ‘나’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동시에 ‘나’의 경험 역시 뇌가 만들어냅니다. 뇌는 춤추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웨트웨어이자 실행 주체) ‘나’는 춤(춤추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동적이고 출현하는 현상, UI) 뇌라는 ‘춤추는 사람’이 있어야 ‘춤’이라는 ‘내’가 가능하고, ‘춤’이라는 ‘나’를 통해서만 ‘춤추는 사람’인 뇌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뇌가 추는 가장 복잡하고 아름다운 ‘춤’인 셈입니다.


플레이어 역할을 하는 게임 캐릭터

아무튼, 내가 지금 ‘나’라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사용자’이며,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인지하는 ‘관찰자’라는 느낌, 즉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느낌을 가진 캐릭터조차도 뇌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재귀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이번에 발생한 ‘나(자아)’가 자신을 사용자라고 자칭하고 있던 것입니다.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느낌을 가진 캐릭터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즉, 뇌가 잠시 ‘게임을 하고 있는 게임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게임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약간 다른 종류의 게임이지만, 플레이어가 아니라 캐릭터인 것은 같습니다(메타인지를 하는 ‘나’, 사용자라고 자칭하는 ‘나’ 역시 캐릭터).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 사용자로서의 경험은 뇌가 (자신이 사용자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캐릭터를 통해 만들어내는 활동 그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임’은 뇌라는 ‘게임기’가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운영하며, ‘나’라는 캐릭터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완벽하게 자립적인 시스템입니다. 어떤 외부의 플레이어나 영혼의 개입 없이도 말이죠. (자립적이라는 것은 초자연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아도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살폈듯이, 우주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뇌는 스스로 ‘나’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고, 이 ‘나’를 통해 마치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듯이 세상을 경험하고, 학습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플레이어는 ‘나’라는 UI를 통해 발현되는 뇌의 기능적 측면인 것입니다. ‘나’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뇌가 스스로를 움직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방법론이자, 뇌가 이 우주 속에서 1인칭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방식입니다.


‘나’는 뇌가 세상을 경험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뇌는 나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 ‘나’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재귀적인 존재입니다. 뇌는 ‘나를 통해서’ (통로/수단) 세상을 경험하고 작동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조직화/통합의 중심)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핵심은 사용자가 ‘나’라는 UI의 화면이나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구성하는 ‘나’라는 UI 그 자체가 ‘사용자의 경험’이라는 점입니다.


뇌가 UI를 작동시킬 때 발생하는 모든 감각, 생각, 지각, 감정, 서사, 그리고 그 모든 처리 과정을 낳는 (계산이 아닌) 모든 입자와 힘의 상호작용(과학에서는 장이라고 하지요)의 총체이자 현현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자, 곧 사용자의 경험입니다. 따로 존재하는 ‘사용가’ UI를 멀찍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나’라는 UI를 구성하고 UI로서 작동하는 그 순간순간이 ‘사용자 경험’이자 ‘내가 존재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멍하니 있거나, 익숙한 일을 무의식적으로 처리할 때 (“자동 조종 모드”), 뇌는 여전히 정보를 처리하고 환경에 반응하며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면서 길을 가다가 목적지에 도착하긴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경치가 스쳐 지나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때조차도요. 뇌는 분명,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는 등, 잘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별생각 없이 걸어가는 도중, 문득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도 비슷합니다.


이러한 모드에서는 ‘나’라는 강력하고 통합적인 UI와 복잡한 내러티브가 활발하게 구성되거나 ‘광역 방송’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뇌가 ‘나’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뇌의 방대한 활동 속에서 ‘나’를 잠시 ‘흐릿한 윤곽’으로 존재하게 하면서, 내부 시스템이 다른 ‘원고’들을 집중해서 처리하는 시기인 겁니다.


‘나’라는 내러티브가 광역 방송되지 않는 위의 경우에도 뇌가 끊임없이 정보를 처리하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료하게 인지’하는 수준의 ‘자기 인지적이고 의식적인 경험’은 아닐 수 있습니다.


뇌가 모든 것을 통합하고 요약하여 ‘나의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 중심의 UI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뇌의 기본적인 정보 처리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뇌는 과거에 무의식적으로 처리했던 정보나 감각도 필요에 따라 ‘나’라는 UI를 통해, ‘나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와 의식적인 경험으로 렌더링할 수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 불현듯 머릿에 떠오르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억이 그때의 실제 정보와 일치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기억이란, 언제라도 뇌가 이 순간에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뇌는 ‘나’라는 UI를 통해 스스로를 운용하고 ‘내’가 주도적으로 내 몸과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뇌 자신’은 ‘나’라는 경험을 통해 삶이라는 게임을 적극적으로 플레이합니다. 플레이어는 게임기 화면 위에 구성된 UI를 통해 게임을 경험니다. 하지만, 의식에 있어서는 사용자가 시각적으로 구성된 풍경이나 ‘나’라는 UI를 담은 스크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풍경을 보고 있다는 의식이 없어도 시각은 구성되고, 경험됩니다. 즉, 시각 정보를 처리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스크린이 구성되어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정보 처리 및 통합을 통해 ‘시각 경험’이 구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도 시지각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수잔 블랙모어의 말을 빌리면, 본다는 것은 생생한 정신적 그림이나 영화를 함의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내가 세계를 본다’는 의식과 경험은, ‘나’라는 내러티브가 시각 정보 처리와 함께 UI에 편입함으로써 비로소 구성됩니다.


눈으로 들어온 빛 정보가 뇌의 여러 영역에서 처리되고, 해석되고, 의미 부여되며, 과거 기억이나 다음 행동으로 연결되는 모든 병렬적 신경 활동의 통합된 흐름이 곧, ‘본다는 경험’입니다. ‘나’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의식’, 그리고 ‘사용자’로서의 우리 자신, 이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되거나 구분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다른 줄 알았던 중력장과 시공간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듯,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장이 곧 공간입니다.) 모두 뇌라는 시스템에서 서로 다른 층위로 발현되는 동일한 실체입니다.








리벳 실험과 사인(sign)

다시 리벳 실험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내가 결정했다’고 의식하는 그 순간은 뇌가 이미 시작한 행동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편입시키며 그 행동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때입니다. 벤자민 리벳 실험에서 뇌가 행동 준비 신호를 먼저 보낸 후, 뒤늦게 ‘나’라는 의식이 그 움직임을 ‘내가 의도했다’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 ‘나’라는 주인공이자 저자는 그 행동과 손가락에 대해 책임을 갖고 ‘사인(sign)’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저자성(Authorship)’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결과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덕분에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누가 그랬어?”라는 질문에 “내가 그랬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며, 이 ‘저자성’은 복잡한 사회적 상호작용에 필수적인 기능입니다. 데닛은 ‘나’라는 인터페이스가 놀라운 인지적 재주를 부린다고 말합니다.


캐릭터들의 유기성과 사용자로서의 몰입

만화책을 보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한 컷 한 컷, 조금씩은 다른 주인공이 그려져 있지만, 우리는 그 모든 주인공을 이야기의 맥락에서 하나로 연결해서 이해합니다. 리벳 실험에서 드러나듯, 과제를 할당받았던 ‘초기의 캐릭터’와 나중에 “내가 했다”고 주장하는 ‘책임지는 캐릭터’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나타납니다. 뇌는 이 캐릭터들의 시공간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단일하고 연속된 존재로 이어주는 강력한 이야기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캐릭터들의 유기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 캐릭터들이 나한테 속한다는 것에 사인하고, ‘미래의 나’라는 캐릭터를 상상해 보며 계획을 세웁니다. 무엇보다 순간순간 그 캐릭터에 몰입하여 삶의 드라마를 이어갑니다.


[뇌의 시점과 ‘나’의 시점. 즉, 과학의 이미지와 일상적 이미지를 오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부록에서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인과로부터의 자유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유의지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의지를 어떤 행위가 물리적 선행 원인 없이도 내 안에서 오롯이 내 뜻과 의지대로 발현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그 선택은 오직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죠. 그런데 오히려 인과관계 없이는 오히려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어떤 선행 사건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일어난다면 어떻게 보면 그건 내가 결정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그냥 발생한’ 사건에 불과할 것입니다.


즉, 내가 A를 선택한 이유가 나의 믿음, 가치관, 정보, 경험 등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그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가치관을 갖게 된 이유도 과거의 다른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과거와는 무관하게 허공에 부유하는 믿음과 가치관을 내가 불쑥 붙잡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하며, 아무런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두고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행동에는 책임도, 의미도 부여하기 힘듭니다.


‘랜덤’이나 ‘어쩌다가’는 자유가 아니므로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사건’들을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은 ‘무작위성’이나 ‘우연’에 가깝습니다. 마찬가지로 양자의 비결정론적 요소도 우리의 자유의지를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확률론적 결정론). 의식을 갖고 매 순간 양자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요.




인과 속에서의 자유

그렇다면,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인과관계 속의 자유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 뇌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수많은 신경 신호와 화학 반응, 그리고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는 물리적 시스템입니다. 모든 생각과 행동에는 물리적인 선행 원인이 존재합니다. 다음은 뮤지컬로도 유명한,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가사 한 줄입니다. “Nothing comes from nothing, nothing ever could.”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신경계가 너무 복잡해서 실생활에서는 결정론에 개의치 않고 마치 자유의지가 있는 듯이 행동해도 문제 될 것 없다”고 말합니다.


크리스토프 코흐는 이렇게 말합니다. “타인의 생각, 타고난 운명, 기타 초자연적인 힘 따위가 나의 행동을 좌지우지하지 않는 것, 그 대신 나의 유전자와 양육된 방식, 살면서 형성된 기호와 욕망, 거기에 뇌의 잡음과 같은 다소간의 무작위적 요소가 더해져 나의 의사 결정이 형성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유다.”

아무래도 자유의지를 묻기 전에 대체 자유의 주체가 누군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살펴왔던 뇌와 ‘나’라는 구성물을요.




자유의지가 ‘사용자 환상’일지라도

데닛 역시 인간 또한 인과관계나 물리 법칙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자유의지’는 어떤 초월적이거나 마법 같은 힘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뇌가 인과적 물리 법칙 안에서 발휘하는 고도로 정교한 ‘자기-작성(Self-authoring)’ 능력 그 자체입니다.


데닛은 이 능력이 우리를 ‘자유로운 에이전트’로 만들어 준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유의지가 물리적 세계의 법칙 안에서, 그러나 생물 진화의 과정에서 발달한 놀라운 능력이라고 봅니다. 그는 자유의지를 “선택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대안들을 인식하고 이성적으로 심사숙고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깊이 생각한 후 내린 선택과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은 이후의 결과에 분명한 차이를 만듭니다.


데닛은 우리의 고려와 결정이 세계에 실제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반사실적 사고 및 학습). 뇌는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고, 다양한 가능성(초안들)을 숙고하며, 합리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단순히 눈앞의 선택뿐 아니라, 예상되는 특정 미래를 피하고, 어떤 믿음을 채택하고 또 내려놓을지에 대한 메타적인 (생각에 관한 생각) 능력이나 자기 조절 능력까지 포함합니다. 데닛은 우리가 세계의 인과적 구조 안에 있으면서도 그 구조에 대한 이해와 반응 능력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자신이 몸과 삶의 주인이며,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당연한 느낌을 가집니다. 데닛은 만약 이것이 ‘사용자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사랑, 무지개, 달러 등 모든 것이 환상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데닛은 ‘나’를 통해 경험하는 주체성, 사랑, 무지개, 자유의지 같은 감각들이 ‘사용자 환상’일지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끌어안고 갈 만한 가치 있는 환상이라고 강조합니다. 어차피 포기할 수 없고 놓아버릴 수 없는 감각이라면 환상이든 현상이든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캐릭터와 함께하는 ‘저자성(Authorship)’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반응 기계가 아니라, 숙고하며 삶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써가는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은 우리에게 더 깊은 자기 이해와 새로운 책임감,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너그럽게 행동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일수록, 연기(緣起)라는 것을 모른 채 연기(演技)를 참 잘하는 사람일수록, 우리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언어가 빚어내는 모순과 역설이 차마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순수해 보입니다.



‘그런 걸 기록해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나?’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래요’ 하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게 대답했으나 물끄러미 시마무라를 응시했다. 전혀 헛수고라고 시마무라가 왠지 한 번 더 목소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눈[雪]이 울릴 듯한 고요가 몸에 스며들어 그만 여자에게 매혹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겐 결코 헛수고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예 헛수고라고 못 박아 버리자, 뭔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 그러니까 헛수고란 이 세상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 대자연 속에서는 모든 것이 미와 신비에 잠겨 세상의 모든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일지도. 옳고 그름, 사랑과 외면, 존재와 소멸까지도.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스피노자는 “자신을 관통하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그 본질을 충분히 표현할 때 사람은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 책에서 탐색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입니다. 분명 인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지위 게임, 지루함, 행위 강박, 자본주의 등의 사회 문화에서 자유롭기 역시 힘듭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인 것들은 중력 상수라고 부르는 숫자처럼 물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서 우리의 선택에 의미가 없다거나,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건 싫건 변화는 언제라도 일어나는 중이며,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아이디어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영원히 불완전한 채로 진화해 가는 사회 문화와 밈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으로, 그리고 ‘심문하지 않는 중동태’ 등의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원할 가치가 있는 자유의 영토를 넓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유의 폭이 넓어집니다. 데닛의 표현을 빌리면, 자유는 진화합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둘 다 환상

한편, 울프 다니엘손은 그의 책 <세계 그 자체>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모두 환상으로 간주하며, 이는 ‘한물간 이원론’과 ‘불가능한 전지적 시점’에 기반을 둔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결론을 내리면서 근거로 삼는 ‘세계의 모형’은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수학적 모델이 현실 그 자체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연법칙은 세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을 ‘기술’하는 방식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중력 법칙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의 낙하 운동을 뉴턴의 중력으로 설명하든 라그랑주 역학의 최소 작용 원리로 설명하든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수학 모델은 우리 머릿속에 있을 뿐입니다. 다니엘손에게는 ‘모델과 세계 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예측하려고 해도 “그들은 우리의 모델과 무관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공전하고 우주는 팽창하고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내릴 것”입니다.


그는 ‘자유의지’나 ‘결정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헤맬 필요 없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우리가 선택을 하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 그 자체는 그 안에 있는 모든 별, 입자, 사람과 함께 자신의 일을 할 것”입니다. 별은 반짝이고, 지구는 돌테니,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하면 될 것입니다.





중동태의 삶: 우리를 현상이나 우주 그 자체로

우리의 생각을 규정짓던 능동-수동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 중동태의 입장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금 보면 새로운 자유가 열립니다. ‘사랑에 빠진다’, ‘감동에 전율하다’ 같은 것은 우리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어떤 경험을 한다기보다는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사과처럼 별수 없이 ‘되어지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나는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살아진다.’고 말합니다. 딱히 결단적인 선택을 내리지 않고 주변을 탐색하며 그저 약간의 필요를 채울 뿐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본 내용들을 보면 자신이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믿음에 균열이 생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도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도 함께 살펴봤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철저히 0과 1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세계나 과학의 세계가 아닌 ‘나’라는 현실적인 1인칭 시점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니까요.(나는 과학 법칙을 믿는다. 하지만 0과 1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만의 경험이 있다. 나는 영적 유뮬론자이다. - 앨런 라이트먼)


설령, 과학의 시점에서 왕관을 내려놓아도, 주인이 아니라도 괜찮은 삶입니다. 자유의지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에 누군가 남긴 댓글이 인상 깊습니다. “문학의 등장 인물에게 자유의지가 없어도 책이 무의미하지 않고, 내가 운전석에 앉지 않은 드라이브에서도 우리는 경치를 즐길 수 있다.”


한편,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도 축구 경기에 레드 카드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앞서 논했듯, 책임은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서명, 그러니까 인책할 수 있도록 돕고, 그 행위가 사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보복성 처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겁니다.


만화 <더 월드 이즈 마인>에서 한 선배 형사가 범인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는 후배 형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형사일수록 범인의 마음을 잘 아는 법. 나는 조금 알 것 같아졌을 때 뭔가 싫어졌어. 그래서 출세를 못 했지.”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 난 포유류 영장목 인간과 소속에 직업은 형사. 너 말야, 네 소중한 사람을 머릿속으로 강하게 생각해봐. 그리고 (네가 때리고 있던 범죄자를) 피가 따뜻해질 때까지 안아 줘. 그 사람이야말로 인간이야.”




우리는 정말 자유일까?

우주는 자신의 발생과 발전 과정에서 어떤 자유를 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유를 느끼는데, 우주와 자연물은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상은, 인간도 자연물이지만요)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큰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자유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우리의 행동이 수많은 선행 사건, 그리고 여러 요소와 함께 엮여 있는지 이해하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우리의 행동이 1초 전부터 몇백만 년 전까지의 선행적인 사건들에 의해 어떻게 구성되고, 결정되는지 신경생물학, 유전 분자학, 뇌과학, 진화, 문화 등의 폭넓은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다음은 로버트 새폴스키의 책 <행동> 서문 일부 내용의 인용입니다.


“어떤 행동이 막 벌어졌다. 그 행동은 왜 벌어졌을까? 첫 번째 설명 범주는 신경생물학적 범주다. 그 행동이 벌어지기 1초 전에 그 사람의 뇌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전 몇 초에서 몇 분 사이의 어떤 시각, 청각, 후각 신호가 신경계를 자극하여 그 행동을 일으켰을까? 이전 몇 시간에서 며칠 사이에 어떤 호르몬들이 작용하여 감각 자극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성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신경계로 하여금 그 행동을 일으키게 했을까?


이렇게 계속 확장해보자. 이전 몇 주에서 몇 년 사이에 환경의 어떤 속성들이 그 사람의 뇌 구조와 기능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호르몬들과 환경 자극에 대한 뇌의 반응성을 바꾸었을까? 그다음에는 그 사람의 유년기, 태아였을 때의 환경, 유전자 조성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자. 그다음에는 그 개인을 뛰어넘는 요인들을 포함할 만큼 시야를 넓혀보자. 문화는 그 개인이 속한 집단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을까? 어떤 생태학적 요인들이 그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까? 이렇게 자꾸 넓혀가면, 결국 까마득한 과거의 사건들과 그 행동의 진화 과정을 고려하게 된다.


이것은 개선이다. 우리가 모든 행동을 하나의 분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대신([특정 호르몬/유전자/유년기 사건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라]) 여러 분과들을 함께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하나의 분과로 설명할 때, 우리는 사실 암묵적으로 모든 분과들을 환기하는 셈이다. 어떤 종류의 설명이든 그것은 그보다 앞섰던 설명들이 끼친 영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빛이 시공간을 따라 휘듯이, 사람은 유전자와 상황에 미끄러진다.





복잡한 인과관계와 마음의 실타래

새폴스키는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만든 ‘표면 아래 얽혀 있는 인과관계의 실타래’를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의지와 노력, 자기 절제가 ‘생물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결정할 사치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그런 생각이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욱요.

그는 이제 과학이 우리의 좋고 나쁜 모든 행동에 대해 전방위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됐고, 이제 우리는 누군가 한 일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비 오는 하늘을 미워하고, 지진이 났을 때 땅을 미워하고, 폐에 침투하는 바이러스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슬픈 것입니다.


새폴스키는 자신 역시 일상의 99%의 시간 동안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지만*, (자유의지가 환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해방이 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가령 수십 년 후, 대부분의 미국인이 동성 결혼에 반대하지 않게 된다면, 3천 년대 초반 학자들은 왜 사람들의 생각이 이제야 그렇게 바뀌었을까, 의견을 나눌 것입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은 기말고사에서 그것이 19세기, 20세기, 21세기 중 언제였는지 기억하려 애쓸 것입니다. 우리가 마녀를 색출하고 화형시키던 중세 유럽인을 보듯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를 무지한 존재로 볼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에 가깝습니다. 아직 과학이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무정한 존재로 보는 것은 불가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도덕성과 못남에 책임을 귀인시킬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시간을 낸다면 그의 상황을 참작하고,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중동태의 세계를, 현상으로서의 우리를요. 이것은 능력보다는 동기의 문제입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사회학의 법정에는 항상 동일한 범인이 잡혀 왔다. 범인의 이름은 놀랍게도 ‘사회’다. 자살의 범인도, 우올증의 범인도, 혁명도, 반혁명도, 과체중도, 거식증도, 변화도, 변화 없음의 범인도 ‘사회였다. 문제는 이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체포하여 법정까지 끌고 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누구를, 무엇을, 어디까지를, 어디에서 체포해야 하는가? 어디서부터가 사회이고, 어디서부터가 사회가 아닌가?

- 김홍중, <은둔기계>



진시황릉 발굴에 있어, 고고학자들은 섣부른 발굴 행위 중에 일어나는 유물 손상을 막기 위해, 더 나은 발굴 기술을 기다리며 잠정적으로 발굴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의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가 인상 깊습니다.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도 고고학자와 같은 섬세함과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 조성과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환경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인식 밖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것들로 인해 내 존재가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뇌가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매혹적인 ‘사용자’라는 현상과 감각,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너그러움을 보이고 인정을 베풀며 어떤 관계를 맺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 우리가 원할 가치가 있는 자유를 향한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




* 데닛은 숙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적으로 매 순간 모든 행위에 대해 숙고를 하기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순간이 숙고의 타이밍인지 반사적 행동의 타이밍인지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요?





세계에 대한 믿음

( 이하의 내용, 특히 “ “안의 내용은 김홍중, <세계에 대한 믿음>, 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옮기고 가져온 내용입니다.)


김홍중 교수에 따르면 세계 대전이나 돌연한 사고,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세계는 한 편의 잔혹한 영화가 되어버립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 세계 속에서, 이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냉소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찬양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그는 “영화는 세계가 아닌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 하며, 우리의 보편적인 정신분열증 속에서, 우리에게는 세계를 믿어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생기려면, 자기가 삭감되어야 한다. 자기가 덜어내지고, 자기의 중심성이 흐트러지고, 자기가 사라져야 한다. 그 사라진 빈자리만큼 세상이 나타난다. 그 세계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들이다. 들뢰즈라면 미래의 민중이라 말할 것이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들뢰즈가 말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조금 더해진 기쁨을 느낀다.”


김홍중 교수에 따르면, 책은 영화와 다릅니다. 책에는 상상할 틈과 여지가 풍부합니다. 그래서 책은 세계를 믿게 하는 대신, 상상하고 표상하게 만듭니다. 라만차의 망상꾼, 돈키호테로 대표되는 구텐베르크적 인간은 급기야 세계 자체를 상상과 표상으로 이루어진 환상으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그에게 구텐베르크적 인간은 기호와 상징의 감옥에 갇혔지만, 그 감옥의 힘으로 주체가 되는 영광스러운 수인(囚人)입니다. 반면, 영화를 볼 때는 “자아와 세계를 매개하는 언어가 정지하고, 문자로 쉽게 담아낼 수 없는 구질구질하고 퀴퀴하고 난잡하고 때로는 혼돈스럽게 생동하는 이미지가 주도권을 얻으며, 자아는 자연스레 무력해”집니다.


“영화를 보는 자는 이미지를 견뎌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투항해야 한다.” 세계에 대한 믿음은 의지와 결단을 갖고 무엇인가를 믿어보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노력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믿음은 그냥 온다. (…) 사도들이 믿음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바이러스처럼 사도들을 감염시켰다.”


“영화는 도구다. 영화는 강력한 도구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영화라는 도구는 그것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그런 도구다. 엄청난 수단인데, 무엇에 소용되는 것인지 아직 모르는 이상한 수단. 수단으로서의 힘이 넘실대지만, 그 목적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그런 수단. 아감벤의 말을 빌리면, 영화는 ‘순수 수단’ 혹은 ‘목적 없는 수단’이다.

영화만이 순수 수단인 것은 아니다. 순수 수단들은 도처에 있다. 정말로 귀하고, 정말로 좋고,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모두가 순수 수단이다. 무력하지도 않고 무가치하지도 않지만. 그 힘과 가치와 목적이 표상과 계산을 벗어나 있는 것들. (…) 타르콥스키 영화는 저 모든 지상적 사물들의 순수 수단성을 그 최대치의 덧없음 속에서 담아낸다. 창조된 모든 것들의 근본적 덧없음, 근본적인 순수 수단성을.”


“영화 비평가나 애호가보다는 ‘영화를 겪는 자’라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 내가 느낀 마음의 흔들림과 변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같이 흔들리자고. 같이 무너지자고. 같이 도망치자고. 혼자 받은 감동 속에서, 이 거대한 세상에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잃은 ‘나’라는 것은, 주체라는 것은, 하염없이 덧없고 외로운 것이 아닌가? 이 책은 그 외로움의 바깥으로, 주체의 외부로 나가는 선을 그려보려는 조그만 시도다. 내가 그린 선들이 당신의 마음에 가닿기를 희망한다.”

- 김홍중, <세계에 대한 믿음> 서문 中





우주는 자유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람을 불어 넣기 전, 점 하나 크기의 쭈글한 풍선을 상상해봅시다. 그 풍선은 아주 작은 검은 점들로 덮여 있습니다. 이제 그 풍선의 표면을 초기 우주라고 생각해봅시다. 즉, 그 점 하나 크기의 풍선 표면 모든 곳이 빅뱅의 시작점인 동시에 초기 우주의 모든 물질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겠습니다. 풍선이 부풀며 표면의 검은 점들, 곧 우주의 은하와 별들이 서로에게서 멀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이 풍선이 특정 ‘중심점’에서 바깥으로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풍선의 표면 어디에서든 다른 모든 점들이 서로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빅뱅은 우주 안의 특정 한 점에서 일어난 폭발이 아니라, 우주 자체가 모든 지점에서 동시에 팽창하기 시작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곳에 있든 그곳을 빅뱅의 출발점이자 우주의 중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심이 없는 우주를 사유할 때, 우리 존재의 위치는 어디에 놓일까요? 모든 것이 인과로 엮여 있어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를 세계 그 자체로, 그리고 세계의 (무수한) 중심 중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여기에서 (‘나’로부터) 펼쳐지는 겁니다. 저는 이 세계를, 저 자신을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의 ‘나’는요.) 저는 꼼짝 없이 그러나 기쁘게 세계를, 그리고 당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우주는 어쩌다가 저 자신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이미 남아돌 만큼 충분합니다(more than enough). 우주는 결코 자유의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 꼼짝 못할 아름다움의 전율.



+ 존 콘웨이의 라이프 게임(Life game)은 몇 가지 간단한 규칙만으로도 예측이 불가능한, 놀랍도록 복잡한 패턴이 만들어지며, 창발성 속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복잡한 세상, 심지어 지능적인 존재를 탄생시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의 답에 영감을 주는 모델입니다.






(이하의 글은 Sabine Hossenfelder, <You probably have no free will. But don’t worry about it>을 참고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의지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행복이나 목숨에 대한 실제적인 위협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 인식에 이질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뇌를 가진 사람은 뇌가 가능한 선택지와 대안을 평가하는 과정을 계산과 전자기 상호작용이 아니라 ‘나의 결정’으로 경험합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더 이상 어떠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두려움과 자신의 선택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우리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는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합니다. 사실, 우리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시도해 보시겠어요?


자유 의지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확률론적으로 결정적인 미래를 바꾸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뇌와 내가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전과 다르게, 그러나 정해진 수순 내에서) 바꿀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정해져 있다.

우리에게는 깨달을 자유만 있다.

- 라마나 마하리쉬


마크튭. 이야기는 이미 씌어 있기에, 미지의 것을 두려워 할 필요 없어. 그저 이야기의 끝을 확인하러 갈 뿐.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한 구절의 변형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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