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나가고 있는 것이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 위화, <인생> -
글은 독자에게 읽히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우리가 ‘나’라는 관점을 갖고 살아가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의 정보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생기거나 하는 것이지. 어떤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가기 이전에 미리 주어지거나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글을 읽음으로써 삶을 살아감으로써 비로소 생기는 것이 ‘의미’라는 겁니다.
개미는 자신이 개미집을 왜 짓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집을 짓습니다. 개미는 그저 유전적 본능과 환경적 조절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개미의 행동이 (종의 생존과 번식 입장에서) 목적 지향적임을 압니다. (인간이라는 이유 추론자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어떻게 해서’와 ‘무엇을 위해’라는 관점에서 이유는 ‘과정으로서’ 충분히 존재했습니다. 데닛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이제 부유하는 합리적인 근거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짓는가?’에 이유와 의미를 표상하고, 심지어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개미와 달리 설계를 미리 끝내놓고 피라미드를 건축할 수 있습니다. 누가 ‘왜 지어요?’라고 물으면, 우리는 자신있게 그 목적을 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현상에 마음을 부여해서 의도를 찾아내려고 애써왔습니다(지향계로 봅니다). 우리가 신의 마음과 의도를 열심히 해석하고 파악하려 할 때도,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의미와 목적의 자유가 있습니다.
[부록에 과학은 Why를 말할 수 없는가?에 대한 글을 첨부하고자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며, 의미를 찾는 여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때로 그 의미 자체가 우리를 옥죄거나, 오히려 삶의 가장 좋은 순간들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책 <무의미의 축제>에서 주인공 다르델로의 거짓말 장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르델로는 생일을 앞두고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습니다. 다행히도 암은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 옛 직장 동료 라몽을 만나는데, 라몽은 다르델로에게 “즐겁게 사시는 것 같네요”라고 말합니다.
‘이상하게도 다르델로는 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너무 가벼운 말투가, 기억으로 여전히 자기 안에 깃든 죽음의 비애, 마법처럼 그 비애를 품고 있는 달콤한 기분, 묘하게 아름다운 그 기분을 없애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다르델로는 라몽에게, 사실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합니다. 그런데, 이윽고 다르델로 스스로도 자신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의아해합니다. 다르델로의 행동은 얼핏 모순적입니다.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지어내는 기묘한 행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르델로는 평소 자신의 삶에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친구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문득문득 찾아오는 즐거움(커피 한 잔의 향취나 햇살의 따스함 같은 소소한 기쁨)을 느끼곤 합니다. 그는 이 즐거움을 온전히 만끽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지금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데, 이래도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와 같은 무의식적인 의미 강박이 그 즐거움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강요합니다. ‘네 목표는 뭐야? 왜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 이런 질문은 우리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그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서로에게 수치심을 슬쩍 권유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의미 없는’ 즐거움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그 즐거움을 합리화할 만한 변명을 찾으려 애씁니다.
다르델로는 아마도 그 순간, 암 환자에게는 삶의 의미가 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절망을 견뎌내고 암을 무사히 치료하거나, 그저 ‘살아가고 또 살아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삶의 무게이자 목적인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암 환자”라는 타이틀을 수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즐거움을 누릴 자격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라몽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해명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그는 ‘나의 즐거운 기분에 말이나 이유, 외부적인 평가를 붙이는 것은 ‘암 환자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것만큼’이나 무례한 일’이라고 반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거짓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어도, 그냥 살아가는 나’에게도 순간순간 찾아오는 일상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고 싶은 간절한 자기방어이자 의미 강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려는 무의식적인 몸부림이었던 셈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거창한 목적을 달성해야만 의미 있는 삶인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경험을 (충만히) 한다는 것 자체에 더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책 <공허의 시대>의 저자 조남호 코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오늘 ‘무엇’을 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깊고 ‘충만’했는지 그것만을 묻겠다”, “진심을 다해 삶을 만끽하시라.”
은둔기계가 추구하는 것은,
죄책감이 동반되지 않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 <은둔기계>, 김홍중 -
하찮고 의미 없는 건, 본디 모든 존재의 본질
삶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해
무의미를 인정하는 걸 넘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것이 지혜의 알파이자, 좋은 기분의 오메가
들이마셔 친구야, 깊이 들이마셔
공기와도 같은 무의미를 들이마셔
완벽하게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 없이 까르르 웃는 아이들
명백하고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아름답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상*
* <무의미의 축제>에 나오는 대사를 일부 변형해서 만든 독후쏭 가사의 일부입니다.
https://youtu.be/tnEbhEyixjs?si=ZQYIh5L_iZX5cBRp
<그저 곁에 있어 줘>
별 아래 기도하는 너를 봤어
헐벗은 채 눈 감고 두 손 모은 너
분명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 중에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무슨 소원 빌었는지 물어보니
내 귀에 살랑이는 수줍은 바람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
(…)
우주는 전부 널 위해 있는 거야
이 말을 너에게 해주려 했지만
더 아름다운 말을 주고 싶었어
무엇을 위해 우리가 있는 걸까?
결코 이유도 의미도 없어
고작 이유와 의미 따위는
단순해, 그저 여기에 있어
그래, 그저 우리가 있을 뿐
그저 곁에 있어 줘
그저 곁에 있을 게
<Lego Big Morl - ただそこにある 가사 변용>
https://youtu.be/BF8Wf_bEeEA?si=924m48vw8cUSQw2w
이방인은 사회의 질서 속에 의미를 찾지 못한 자이지만, 그럼에도
끝내 태양을 느낀다. - 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