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허락하지 않는 거겠지.’
저는 그날 이후, ‘세상이란 하나의 개인일 뿐이다’라는
철학을 갖게 되었습니다.
- <인간 실격>, 디자이 오사무
우리는 항상 예상하고 예측한다. 빠른 반응을 위해 얻게 된 적응적 특성.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머릿속에 예측의 기반이 되는 세계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 모델을 믿으며, 믿어야 한다. 매번 모든 것을 전제부터 의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계 모델은 ‘나’에 대한 모델을 포함하며, 우리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삶의 토대가 된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믿음이 허물어질 때가 있다. 세계 모델이 만들어낸 예측이 실제 상황과 정면충돌할 때다. 차분히 커피 한잔 홀짝이며 생각해 보자. 우주가 틀렸을까. 내 세계 모델이 틀렸을까. 우주는 어마어마하게 큰데, 내 뇌는 무지막지하게 작다. 오케이. 순수히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세계 모델을 수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우주에는 기꺼이 한 수 접어주겠단 말이다. 우주가 꼭 내 기분에 맞게, 예상대로 움직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다만, 문제는 나의 세계 모델과 너의 세계 모델이 충돌할 때 생긴다. 특히, 네가 내 세계 모델이 단단히 잘못됐고, 완전히 틀린 것임을 주장할 때. 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소중한 나의 세계 모델을 통제하고 수정하려 할 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오르는 분노. ‘네가 뭔데?’
잠깐, 이 분노는 내가 ‘나의 세계 모델을 통제하려는 당신의 세계 모델이 틀렸으니, 당신에게 수정을 요청하려는’ 세계 모델을 가졌다는 증거 아닌가?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를 바꾸려고 하는 너’를 내가 바꾸고 싶은 마음이니, 결국 너나 나나 둘이 또이또이인 것이다.
자자, 말장난은 그만하고 우리 비긴 걸로 하자. 아니, 네가 이긴 걸로 하자. 나는 나를 양자(quantam)의 우연성과 함께 작동하는 우주의 장(field)에서 똑 떼어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 모두 우주의 한복판에서 함께 흘러가는 존재. 당신 역시 이 우주의 찬란한 현상이라는 점을 존중하겠다. 다시 우주 vs 세계 모델의 구도. 결국 수정해야 하는 것은 나의 세계 모델 쪽.
내가 가진 세계에 대한 강력한 믿음 한 줄을 쓰기 위해 지면을 낭비해 버렸다. 한 줄 요약. 모든 것이 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니 화내지들 맙시다. 아니, 아니. 나는 화내지 않고 살겠습니다.
인간 실격의 한 부분과 함께 제가 썼던 에세이를 다시 보면, 우리가 ‘세상’이나 ‘신’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존재자의 허락과 제약은 사실, 뇌의 ‘세계 모델’이 만들어내서, 자신에게, 또, 서로에게 부과하는 가상의 제한에 불과한 경우가 많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세계 모델을 유연하게 수정하고 확장할 수 있습니다. 울프 다니엘손의 말을 빌리면, 모든 모델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 다다르면 새로운 질문이탄생하기 마련입니다.
우주는 화내지 않습니다. 우주는 그저 흘러갈 뿐입니다. 우주처럼 집착하지 않고 우주와 함께 흘러갈 수 있다면, 불필요한 고통을 조금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욕심, 분노, 어리석음 등 모든 것을 포함한 것까지 우주의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 동성애 행각을 하는 동물들을 보며, 최재천 진화생물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자연적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겁니다.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이런 독백이 나옵니다. “기분이 정말 이상해. 공포도 별로 느껴지지 않고, 주위가 훤히 보여. 이젠 어떤 결과를 맞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 만화 <더 월드 이즈 마인>에는 이런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Don’t resist. Accept. Everything is connected.”
우리가 일상에서 누구에게 가장 화를 많이 내는지 조사한 연구가 있습니다. 그 결과, 압도적 1위는 부모님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심리적으로 매우 가깝다고 인식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겹치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 관한 정보를 처리할 때도 자신에 관한 정보를 처리하는 것과 유사한 ‘자기 참조 처리 기제’가 일어납니다. 우리 뇌가 그들을 사실상 ‘자신’의 일부처럼, 혹은 ‘자신과 긴밀하게 연결된 대상’으로 인지하고 처리하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나’와 내가 ‘나와 가깝다고 여기는 사람’에 대해 분리가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곧잘 가까운 사람에 대한 통제 욕구가 생깁니다.
우리는 각자의 성장 배경, 사고방식, 입장과 정보 차이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제한된 관점과 정보만으로 타인의 상황과 의도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채 통제하려 하거나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해주지 않는 엄마가 답답해서 화를 내고, 부모는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에게 과하게 간섭하며,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는 연인과 마찰이 생기고 투닥댑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가장 경청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존중하고 사랑을 줘야 할 소중한 사람에게 정반대의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자기혐오도 있습니다. 이럴 때 자신을 몰아세울수록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멀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책 <넛지>의 저자 리처드 세일러에 따르면, 너무 강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부드럽게 인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방향이 훨씬 낫다고 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일 확률이 높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용기도 필요합니다. 과한 통제 욕구는 스트레스와 강박을 불러일으킵니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 라인홀드 니버, <평온을 위한 기도>
우리는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지만,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중요하다.
- 브라이언 클라스,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낯선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될 때까지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게 될 때까지
모든 것이 저절로 저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그래도 경이는 분명 끝까지 경이로 남을 테니
뒤늦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게 됐을 때
지구는 언제라도 팽글 돈다는 걸 실감할 때
언제라도 배경 속에서 흘러가고 있던
세계의 비밀을 알 수 있게 되기를
어떤 원주민들은 성인식 때 가면을 쓰고
예로부터 전해지는 비밀을 전수 받는다는데
그렇게 그들은 비밀의 전승자이자 수호자가 된다.
그 비밀의 내용은 바로...
“비밀은 없다.” 이것이다.
[양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모든 것의 근본적 토대와 그 속성을 부록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