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며: 텅 빈 충만

by 밈바이러스

좋은 게임이란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그만두기 전에 가르쳐야 할 것을 모두 가르쳐 주는 것이다. (…) 결국, 게임은 선생님이다. 재미는 학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게임은 게임이 묘사한 현실의 작동 방식을 가르쳐주고, 자신을 이해하는 법,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법, 상상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 라프 코스터




“우주라는 참 괜찮은 서버에서, 우리는 지구 채널의 포유류 영장목 인간과 소속 개발자이자 플레이어이므로, 다음 플레이어들에게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주기 위해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게임의 원리를 파악해 사회 문화라는 게임 규칙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


생물학적인 인간으로서 생로병사를 포함한 모든 고통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기꺼이 겪어야 할 드라마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더 의미 있는 고통을 선택할 수 있는 사치를 부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실어 나르고 복제하라는 유전자의 추동, 진화의 과정에서 갖추게 된 편파적인 마음.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침투하고 번성해서 우리 행동에 모종의 변화를 일으키는 밈.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개개인의 행복에는 별 관심 없이 맹목적으로 번성하는 사회 문화를 구성하는 것이 밈 복합체임을, 그리고 우리는 그 사회 문화 속에서 자연스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그 문화를 더 공고히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나’라는 것이 어쩌면 그저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르며, 우리 몸이 지금 여기, 언제라도 한 번뿐일 이 순간, 사용자라는 경험을 제공하는 정말로 극히 드문 우주적 현상을 지원하는 것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학과 이야기의 힘을 빌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갑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작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가시광선이 아닌 다른 빛의 파장을 (간접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통해 절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확장해 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1인칭의 사용자 시점을 벗어나,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넘어서서, 전지적 U(N)I(VERSE) 시점에 근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시점은 진화합니다.

한편, 침묵이 없다면 어떤 소리도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소리는 배경의 침묵에 의존하며,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라는 빈 간격에 의존합니다. SPACE는 우주라는 뜻도 있지만 공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흰색 종이가 있어야 검은 글자가 펼쳐질 수 있듯이 우주에도 텅 빈 공간이 있어야 현상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빈 공간과 간격입니다. (하나가 둘이 되려면, 또 둘이 셋이 되려면 그 사이에 간격이 하나 더 생겨야 합니다.)


원자도 99.9% 이상이 빈 공간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합니다. (빈) 공간이 없다면 어떤 개별적인 사물도 현상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주는 본디 텅 빈 곳이 훨씬 많은 공간입니다. 하지만, 반사되어 들어오는 가시광선 영역대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텅 빔과 그 깊이를 직접 인지하지 못합니다. 완벽한 진공에서 빛 한 점 없다면 우리는 오로지 끝없는 ‘무(無)’를 체험하게 될 뿐이지, 그것을 ‘깊이’와 함께 인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망원경을 통해 아주 멀리 있는 저 희미한 은하들을 볼 때, 그제야 여기와 저 은하 사이에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텅 빈 공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지는 ‘경계 짓기’와 ‘구별하기’를 통해 작동합니다. (흑과 백, 음각과 양각처럼) 이 관점에서 보면, 빈 공간과 물체는 상호의존하는 관계입니다. 빈 공간을 통해 물체가 있으며, 물체를 통해 빈 공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방 안의 ‘빈 공간’을 인식할 때도 사실은 벽, 가구, 천장, 바닥 등 공간을 에워싸는 ‘물체들’의 존재를 통해, 그 사이에 비어 있어,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파악합니다. 다른 물질과 충돌하지 않고 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경험을 통해, 그 공간이 물리적으로 비어 있음을 몸소 느낍니다. (물론,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실제적으로 먼지나 공기가 있어 진공이 아니기는 합니다.) 우리가 빈 공간을 인식하고, 또 움직이는 것은 물체의 존재, 그리고 물체 사이의 간격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텅 빈 공간을 직접 인식하는 대신, 대부분의 시간 눈에 보여서 인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도 보통 진화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쾌와 불쾌의 느낌을 주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공(空)’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관심이 진화의 표준입니다. 관심은 한정된 자원입니다.)


‘공’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나 ‘허무주의’ 같은 걸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했던 빈 공간은 실제로는 말 그대로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앞서 “흰색 종이가 있어야 검은 글자가 펼쳐질 수 있듯이 우주에도 텅 빈 공간이 있어야 현상이 펼쳐질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직관적으로 비유에 별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양자 물리학의 눈으로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빈 공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빈’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 세계에서의 빈 공간

우리가 흔히 ‘빈 공간’이라고 말하는 ‘진공’은 고전 물리학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양자 역학의 관점으로 들어서면, 진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진공 속에서는 끊임없이 ‘진공 요동’이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입자-반입자’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마치, 표면이 잔잔해 보이는 수면이라도 자세히 보면 미세한 물결이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텅 비었다’는 건 우리의 감각적 인지일 뿐, 그 안은 말 그대로 ‘텅 빈 충만(Empty Fullness)’으로 들끓고 있는 겁니다. 또한, 원자가 99.9% 빈 공간이라는 말도 ‘전자의 확률 구름’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자구름은 비어 있다고 할 수 없는 역동적인 공간인 셈입니다.




카를로 로벨리가 재해석한 공간

한편,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루프 양자 중력 이론(LQG)’을 통해 우리가 아는 공간 개념을 뒤흔듭니다. 그에게 공간은 현상이 일어나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가 역동적인 관계의 덩어리며 실체입니다. 로벨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중력장이 곧 공간임을 언급하며, 공간(중력장) 또한 양자화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공간은 우리가 생각하듯 매끄럽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공간의 알갱이’들 그러니까, 루프(고리)로 이루어진 미세한 양자적 그물망이라는 겁니다.


로벨리에게 ‘빈 공간’이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비어 있는 방이 아니라 시공간과 모든 것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관계의 그물망’입니다. 중력장은 물질과 에너지를 담을 뿐인 수동적인 컨테이너가 아니라 루프들로 이루어진 양자 공간으로서 끊임없이 양자적으로 요동하며 모든 현상과 불가분하게 얽혀 있습니다. 무수한 가능성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우주의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바탕이자 총체입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장(場)과 그에 따른 에너지와 물질이 시공간적 양자 직물의 특정한 ‘들뜸 상태(excitation)’ 그 자체로서 발현하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LQG 역시 아직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이론이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불교의 공(空)

불교에서 말하는 ‘공’ 역시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뜻을 보면, ‘홀로 영원히 존재하는 본질(자성)이 없음’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의 모든 것은, 독립적인 실체 없이 서로 복잡하게 연결된 원인과 조건(인연)에 의해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흐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되지 않은 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緣起)’는 이 상호 의존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현상이 사실 ‘비어 있음’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꽃은 씨앗, 햇볕, 물, 흙, 농부의 손길 등 수많은 조건이 어우러져 피어납니다. 꽃 자체에 ‘영원불변한 꽃의 본질’은 없습니다. 조건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것. 이게 바로 ‘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 고정된 실체 없음은 사실 텅 빈 충만으로 가득합니다. ‘공’, 그러니까 텅 빔이 어떻게 ‘충만’으로 이어지는 걸까요? 바로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고정된 본질이 없이 ‘공’하므로,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변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충만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텅 빈 충만

양자 공간과 불교의 공(空)은 텅 빈 충만으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빈 공간’은 실은 역동적인 장(場)이었습니다. 정적이고 빈 것처럼 보이는 공간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며 현상 그 자체와 얽혀 있는, 수많은 것이 펼쳐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텅 빈 충만’이었습니다. (양자장 이론에 따르면, 공간 그 자체가 양자가 아닐지라도, 적어도 모든 입자는 각각 해당 장(場)의 들뜸이며, 양자들의 역동적인 교환을 통해 모든 상호작용이 이루어집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그리고 앞서 함께 살펴봤던 내용에 의하면,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는 ‘자아’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공’합니다. 나의 몸, 마음, 생각, 감정은 유전자, 성장 배경, 예상치 못한 사건, 이런저런 경험, 사회적 관계 등 수많은 ‘인연’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지만, 바로 그 비어 있음 덕분에 변화 속에서 온갖 경험(고통, 행복, 우울, 사랑 등)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충만하게 펼쳐낼 수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 계속해서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주 자체가 자신의 형태를 바꾸어가며 놀고 있는데, 그 놀이의 한 부분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라고 한 부분 기억나시나요? 우주 역시 고정된 자성이 없는 거대한 텅 빈 공간이지만, 그 공간 안에서 별이 태어나고 은하가 소멸하고, 생명이 진화하는 등 무한한 사건이 충만하게 펼쳐집니다. 우주가 ‘공’하므로 모든 가능성을 품는 충만함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이야기가 흘러가는 배경이자 현상이며 경험인 ‘의식’ 역시 고정되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텅 빈 무대에서 사용자, 당신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원래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빈 공간, 텅 빈 충만 그 자체가 아닐까요? 자신의 단일함과 무한함에 심심하고 하품만 하던 우주는 흘러가고 흘러가다가 어느 시점에 여러 뇌를 거쳐 수많은 ‘나’를 만들어내서 우주 자신을 더 아름답게 그려내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앞서, ‘나’는 뇌가 추는 가장 복잡하고 아름다운 ‘춤’이라는 비유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보다 더 전에 텅 빈 충만을 이루는 양자(루프)가 요동함으로써 ‘뇌’라는 춤을 추고, 다시 뇌가 ‘나’라는 춤을 추고 있던 것입니다. 뇌의 가장 아름다운 춤을 넘어서,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춤이 당신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정한 ‘나’는 특정한 이야기에 갇힌 자아가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적 빈 공간이며 ‘공’의 찬란한 반영이었음을. 채워야 할 것이 있는 어떤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광활하고, 이 순간에 영원한 빈 공간 그 자체. 언제라도 텅 빈 충만 속에서 어떤 리듬에 자신을 내맡기고 몸을 흔들며, 지금은 잠시 ‘뇌가 내가 되기까지의 춤’을 추고 있을 뿐. (다음 한 줄을 위해, 멀고 먼 길을, 참으로 멀리도 돌아왔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텅 빈 충만이 당신이고, 그 텅 빈 충만이 우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우주적 ‘텅 빈 충만’이 ‘나’라는 현상을 통해 스스로를 경험하는 전율적인 순간이고요. 책의 서두부터 써왔던 표현, 사용자(user). 이 우주 속에서 참으로 공한 존재. 그 사용자들이 이 한순간, 창백한 푸른 점에서 덩굴(vine)처럼 얽히고설켜 우주를 함께 경험합니다.*


제가 믿는 바로는 우주를 만든 사람이 신이 아니라 우주 그 자체가 신(스피노자의 신)입니다. 우주 위에 우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우주입니다. 하나의 우주로서, 시공간의 장, 그리고 모든 것과 함께 얽혀있는 존재들. (우주에 바깥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이미 바깥이 아니라 같은 세계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세계 밖에 있는 것이나 다른 우주와는 상호작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구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하는 우리입니다. 저는 우주를 믿으며, 세계 그 자체인 당신을 있는 그대로 추앙합니다. 다시 한번 게임의 0번째 규칙을 강조하며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절대로 이것이 게임(우주의 놀이)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라!” 왜냐하면 그저 게임이라는 것을 알면 플레이어(우주)의 흥이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껏, 잠시나마 자신의 무한함을 잊어버렸는데!) 다행히 우리 뇌는 이것이 단순한 놀이임을 망각할 정도로 완벽한 몰입감을 줍니다.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서 ‘나’라는 캐릭터에 몰입하며 그 모든 순간과 경험을 온전히 즐기고, 또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찾아올 수많은 ‘나’, 그리고 영원과 찰나 그 사이 잠깐의 시간, 이번 놀이 한 판을 함께할 주변의 다른 모든 플레이어(존재)에게 조금 더 그윽한 애정을 갖고 놀이에 참여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언젠가는 말이다. 한 줌의 공기로도 숨은 못 쉬는 날이 올 게다. 그때는 무엇으로 버틸래? 기억일랑가, 사람일랑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일까. 궁금하면 지금 숨을 참아보렴. 네 안에서 숨 쉬는 게 뭔지, 그게 세상 모든 것이 될 수 있는지 말이다.”

- 동구, <비밀 수집가>



* user과 vine의 여덟 알파벳 순서를 섞으면 universe가 됩니다(애나그램). 물론 짜맞추기와 의미 부여지만, 해석은 자유이며, 그 의미는 우리의 것입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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