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와 나가르주나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김정훈 역, 2023, 쌤 앤 파커스를 참고하고 옮겼습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양이 사실은 상대적이었다는 발견은 물리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그는 양자 세계를 공부하던 중, 어느 날 2세기 무렵의 인도 철학자 나가르주나(용수)의 텍스트를 발견합니다. 그 핵심 논지는 “다른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입니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앞서 살폈던 공(空)처럼, 나가르주나는 구조 그 자체도 텅 비어 있다고 말합니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토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론적 양자 해석에 따르면 대상의 속성은 “상호작용하는 순간”에만 존재하며, 그 속성이 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만, 다른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선 “어떤 속성이 다른 대상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가령 속도는,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해 갖는 속성입니다. 제가 지하철을 타고 칸과 칸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 걸을 때, 내가 지하철에 대해서, 지구에 대해서, 태양에 대해서, 안드로메다 은하에 대해서 갖는 속도는 모두 다릅니다. 하늘은 그 자체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의 눈에 대해서만 색을 갖습니다. 포도당 분자는 그 자체로 달지 않으며, ‘달달함’은 포도당 분자가 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 미각 세포와 상호작용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하는 속성입니다.
여기서 제가 생명에 관해 가진 의견을 덧붙이면, 사실상 모든 것과 모든 것이 연결되었지만, 생명은 특히 자신의 생식과 관련된 속성과 패턴을 집중적으로 감지하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 속성이 한 대상과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만, 다른 대상의 관계에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상호작용을 동시에 파악하고 기술할 수 있는 존재자는 없습니다. (“세계는 다양한 관점의 게임 속에서 산산조각 나며, 단일한 포괄적 시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관점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뿐, 결코 궁극적인 실체가 아니다.”)
다시 나가르주나와 로벨리의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그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토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탐구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게 되죠.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실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론자도 아닙니다. 현상의 세계는 우리가 탐구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 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일반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의존성과 우연성 의 세계이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카를로 로벨리는 물리적 대상 그 자체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서도 물리적 대상의 발현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합니다. 우주는 상호작용의 촘촘한 그물망입니다.”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이 없으며, 우리의 존재는 그물망의 일시적인 ‘매듭’일 뿐입니다. 이성을 가진 우리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관찰”은 물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는 상호작용을 말하며, 우리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관측되는 세계의 현상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상호작용이 있기 이전에 우주의 각 기본적 요소나,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속성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기본적인 실체도 그것이 상호작용하는 대상의 맥락 없이는 기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속성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에 놓인 다리인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확실성을 원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확실성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성의 근본적인 부재를 먹고 성장합니다.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시각은 부분적 지식에 불과합니다. 어떤 관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지식이고 보편적인 기준인 단 하나의 시점이란 존재하지 않죠. 그러나 부분적인 시점들도 서로 소통 가능하고, 각 지식은 다른 지식과 현실과 서로 대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대화를 통해 수정되고 풍부해지고 수렴되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깊어집니다. 이런 과정의 행위자는 현상으로 이루어진 현실과 분리된 주체가 아니고, 초월적인 시점도 아니며 현실 그 자체의 일부입니다. 현실의 이 부분은 자연 선택을 통해 유용한 상관관계, 즉 의미 있는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앎) 또한 그 자체로 현실의 일부인 것이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정보이며, 이는 우리와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입니다.”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의미 있는 정보를 생성해내는 상호작용의 한 가지 결과입니다. 그것은 외부 세계와 나의 기억 사이의 상관관계인 것이죠.” 우리는 이 상관관계 안으로부터 세계를 알고 예측하려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할 뿐만 아니라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며, 예측 능력을 가졌습니다. “만일 어떠한 대상이 계산과 예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복잡하다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뒤따르는 상호작용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의식의 현상학이란, 뉴런이 전달하는 신호에 포함된 관련 정보를 비추는 거울 게임에서, 이러한 과정이 자신에게 부여한 이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미국 철학자 에릭 뱅크스의 말대로,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은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페이론은 ‘무엇이라고 규정되지 않는 것, 단정할 수 없는 것, 관찰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원자핵을 이루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쿼크도, 그 자체로는 단독적으로 관측되지 않습니다. 쿼크의 전하와 색전하 같은 속성 역시 양성자와 중성자를 비롯한 여러 강입자들의 관찰된 성질로부터 역추론하여 그 존재와 특성이 제안되었지요. 물리학자 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리학의 임무는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거나 ‘현상의 정수’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
인생은 무상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소중합니다.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평온함과 가벼움, 아름다움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미지의 이미지일 뿐입니다. 실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얇고 연약한 베일일 뿐이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카를로 로벨리,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