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왜(Why)라는 궁극적인 질문이나 가치 판단에 답할 수 없다. Why는 종교의 영역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니얼 데닛은 “무슨 소리! 과학이 그걸 왜 못 해?”하고 버럭할 것입니다. 데닛은 평생을 걸고, ‘목적’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왜’라는 질문의 기원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데닛은 ‘설계자 없는 설계’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목적성’을 설명합니다. 진화라는 것은 우연한 변이와 함께 환경에 더 잘 맞는 개체만 살아남는 맹목적인 자연선택 과정입니다. 하지만, 수십억 년 동안 마음 없이 일어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는 놀랍도록 목적이 있어 보이는 생물들이 생겨났습니다.
개미는 의식적으로 ‘왜’ 집을 짓는지 모릅니다. 개미의 뇌는 단순히 특정 자극에 반응하고, 본능적인 행동 패턴을 따르도록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을 실행할 뿐입니다. 우리가 개미의 집 짓는 것을 ‘목적 지향적’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시선(설계 스탠스, Design Stance)에서 그 행위가 종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기능을 수행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개미의 목적성은 개미 뇌 속의 의식적 의도가 아니라, 수십억 년에 걸친 자연선택(유전, 변이, 선택)이라는 맹목적인 알고리즘이 개미에게 작용한 것입니다. 개미 자신은 그 목적을 알거나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렇게 작동할 뿐입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대상이나 현상을 마주할 때도, 이에 의도나 목적을 찾아내거나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마음 부여(intentional stance)’라고 부릅니다. 이 경향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종교의 진화를 이끌었습니다. 초기 인류는 혼돈 가득하고 예측 불가능한 자연 속에서 생존해야 했습니다. 번개의 신, 태양의 신, 비를 주관하는 신 등 다양한 자연 신들을 상정하며 자연의 의도를 해석하고 예측하려 했습니다. 특히 농경 사회에 접어들면서, 자연의 변덕은 곧 생존과 직결되었기에 이러한 마음 부여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인간은 자연 신에게 잘 보이고자 여러 의식을 행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문제는 단순히 자연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던바의 숫자가 시사하듯, 150명 남짓한 소규모 집단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평판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며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 도시가 형성되고, 익명성이 커지면서 ‘한번 스치고 말’ 제삼자와의 상호작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때 직접적인 감시와 평판 유지를 통한 통제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마음 부여’ 경향은 다시 한번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거대한 사회적 의도를 지닌 존재, 즉, 도덕적 신의 출현을 촉진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모든 것을 감시하고, 인간의 행동과 마음가짐에 대해 상벌을 내리는 ‘신의 눈’은 복잡하고 익명화된 사회에서 신뢰와 협력을 유지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도덕적 신은 개인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존재로 여겨져, 직접적인 사회적 압력 없이도 개개인이 스스로 도덕적 규범을 준수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도덕적 신이 선악을 구별해서 우리를 심판한다는 믿음 역시 우리 인간의 마음 부여 능력이 작동한 결과입니다. (참고로 유목민 문화에서는 전쟁과 관련된 신, 열대우림 문화에서는 다신론이 우세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적 믿음이나 개념이 어떻게 진화하고 퍼져나갔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결정타는 문화의 진화를 문화 복제자 ‘밈(meme)’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초월적인 목적론이나 신이 내려준 지침이 없이도, 순전히 어떻게 그 아이디어나 믿음이 퍼지고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WHY를 찾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개미와 인간의 건축이 어느 수준으로 다른지 살펴볼 수 있게 됐습니다. 데닛의 표현을 빌리면,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된 시스템이 ‘목적 지향적으로 작동’할 뿐인 개미와 비교했을 때, 인간은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통해 의식적인 목적을 세우고, 서로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공동으로 작업하며 목적을 세상에 구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습니다.
데닛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에 궁극적인 ‘Why’는 없다. ‘왜(Why)?’처럼 보이는 모든 현상들은 사실 ‘어떻게(How)’ 작동하는 복잡한 과정들의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가 목적이라고 부르는 것들, 심지어 신의 목적처럼 보이는 것들까지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무작위적인 과정에서 살아남은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멋진 점이 생깁니다. 우리는 아무런 목적 없이 돌아가는 ‘자연선택’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How’가 우리에게 ‘목적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선물한 것입니다. 우리의 뇌, 우리의 의식, 그리고 우리가 만든 문화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유전자나 환경이 정해주는 대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목적을 만들고, 선택하고, 바꾸고, 심지어는 아예 ‘목적’을 정의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적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왜(Why)’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정해주는 게 아닙니다. 진화 과정에서 인간은 마음 부여 능력으로 ‘자연과 신의 목적마저 추론’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목적을 왜 추론하고 싶어하는지, 어떤 식으로 추론하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이 있건 없건, 신에게 마음을 부여해서 우리 삶의 방향을 잡아보려는 시도 자체가 결국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데닛은 초월적인 의미에서의 목적은 없고, 모든 목적성은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인 과정의 산물일 뿐이라는 냉철한 사실이 오히려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직접 만들어갈 자유를 준다고 합니다. 데닛에게 ‘과학은 목적을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인간이 스스로 Why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포기하고 마음 부여를 통해 신에게 궁극적인 Why를 맡기려는 습관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과학은 Why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힐 수 있으며, Why는 이제 당당히 우리 인간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박문호 박사라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OH MY SCIENCE!”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지요. “실재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의 과학은 아직 원시적이고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기도 하다.”
+ 모든 생물의 존재 이유는 ‘그야 태어났고, 또 살아 있으니까’가 기본입니다. 진화생물학이 엄밀한 수학 모델을 세울 수 없어도 수학 또한 은유이고 비유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데이비드 헤이그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은유입니다.
++ 우주의 ‘과정’ 속에서 피어난 지성, 그리고 그 지성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연 선택’이라는 이름표. “나는 자연 선택에서 살아남은 우월한 종이다!”라는 자신감, 그리고 같은 종에서 내보이는 ‘도덕적 우월감’. 자연 선택 역시 우리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붙인 이름일 뿐, ‘나’라는 존재는 (확률론적이라 할지라도) 결정론적인 흐름 속에서 발생한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뛰어남에 으쓱하며 다른 종과 개체를 비난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다.
우리는 우주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며, 모든 생명 현상이 그렇듯 특정 초기 조건과 흐름 속에서 그저 (어쩌다가) 발현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자유 의지를 갖고 남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요청합니다. 당신에게 정말 자유가 있고 의지가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못되게 굴면서 행복을 쪼아먹지 말고, 스스로 행복하기를 선택해주시기를.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쪼아먹는 코카서스의 독수리가 생각납니다.)
올리버 색스는 간혹 자기 자신을 일컬어 임상존재학자(clinical ontologist)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그의 의사 생활이 환자를 상대로 한 다음과 같은 질문의 연속이었음을 의미했다. “어떻게 지내세요?(How are you?)”이 질문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세요?(How do you be?)”라는 존재론적 질문이었다.
- <그리고 잘 지내시나요, 올리버 색스 박사님?>, 로런스 웨슐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