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관점 오가기의 효과

과학적 이미지와 현시적 이미지

by 밈바이러스

뇌의 실제 작동이라는 ‘과학적 이미지’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캐릭터 주도 이미지(현시적 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차원을 넘어서는 심오면서도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마치 네커의 정육면체를 볼 때 하나의 이미지에 대해 두 가지 관점(왼쪽 아래로도, 오른쪽 위로도 튀어나온 정육면체처럼 보이는 2차원의 착시 그림)을 오가며 새로운 인식을 완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커.png


뇌의 실제 작동이라는 과학적 이미지와 우리의 캐릭터가 주도하는 일상적인 이미지를 오간다는 것은 인터페이스 안과 밖의 벽을 인식하고 허물어보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물론 벽을 허무는 것보다는 우리의 인터페이스가 더 유연하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마술을 트릭으로 해체하는 지혜

‘나’와 의식은 마치 뇌 밖에 있는 신비로운 무언가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마법처럼 여겨집니다. 이 신비를 감히 파헤치려고 들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면 매력을 잃는다’는 생각은 의식이 가진 트릭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트릭을 알게 되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나’가 뇌 안의 특정 장소에 있거나, 뇌와 별개인 무언가라고 착각하는 오류, 데카르트적 이원론(마음과 몸의 분리)을 넘어서게 해줍니다. ‘나’는 뇌의 과정이자 활동의 결과물이며, 달리 보면 ‘뇌’의 또다른 층위임을 명확히 인지하게 됩니다. (춤이라는 활동은 춤추는 사람의 몸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향상된 자기 인식과 통제 능력

관점 오가기는 향상된 자기 인식과 통제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를 알아챘다’는 현상학적 이미지와 ‘뇌가 화라는 상태를 인지하고 그것을 나라는 UI를 통해 경험하게 했다’는 과학적 이미지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됩니다. ‘화라는 감정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관찰하는 순간, 뇌는 그 감정적 반응에 휘둘리는 대신 반응을 늦추고 다른 행동을 선택할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이러한 ‘분리’ 경험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하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줍니다. (‘I am angry’와 ‘I feel angry’의 차이입니다.)


또, 감정이 뇌의 특정 패턴에서 발생하며 ‘나’라는 인터페이스로 경험된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감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다루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 감정은 뇌가 만들어낸 특정 시나리오다’라고 이해하는 것으로 감정을 재평가 할 수 있게 됩니다.



책임과 자유의지의 재개념화

벤자민 리벳 실험에서 “내가 했다”는 서명이 나중에 이루어진다는 과학적 이미지를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내가 그 행동의 책임자’라는 현상학적 이미지를 놓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의지가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마법 같은 것이 아니라, 뇌의 고도로 정교한 기능적 환상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환상이 사회적 존재로서 책임을 지고, 행동으로부터 배울 수 있으며, 미래를 계획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유용한 도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더 따뜻하고 풍부한 세계 경험

어떤 사람들은 ‘다 환상이면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데닛은 반대로 말합니다. 과학적 이미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현상학적 이미지의 풍요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풍부함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게 되면서 더욱 깊은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합니다. 무지개를 광학적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름다움이 물리 법칙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는지 알게 되면서 더 큰 경외심을 느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대한 유전학자 역시, “이해된 신비는 이해되지 않은 신비보다 경이롭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길을 걸을 때 (뇌에서 구성되어) 느끼는 풍경 하나하나에,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뇌의 시각 체계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데닛은 이렇게 말합니다. “초자연적인 것은 필요 없다. 이미 자연은 충분히 경이롭고 숨 멎을 만큼 아름답다.” 뇌의 작동과 사용자 인터페이스 사이를 오가며 인식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를 넘어, 우리의 의식적 경험(‘나’)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삶에 더 큰 의미와 책임을 부여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배경 자아

김주환 교수는 책 <내면소통>에서, 배경 자아를 언급합니다.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나’이자 ‘고요함’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직접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경험과 기억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주체로서 항상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명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에고로부터 해방된 평온한 자아’라고 말합니다.


언어 기능과 밀접하게 관련된 좌뇌는 ‘나’라는 자아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해석하는 데에 주된 역할을 합니다. 반면, 우뇌는 공간 인지, 정서 처리, 비언어적이며 전체적인 패턴 인식과 관련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배경 자아’를 좌뇌 해석기와의 균형을 맞추려는 (우)뇌의 시스템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뇌는 인지 시스템 전반을 조절하고 안정화하며, 고요하게 시스템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합니다.


데닛은 명상을 통해 얻는 고요함이나 초연함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특정한 경험을 ‘본질적 자아’의 발현으로 해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뇌의 특정 신경 활동 패턴이 변화하여 ‘광역 방송’의 잡음이 줄어들거나, 특정 원고들이 활성화되지 않는 상태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특정한 정서적 상태(평온함)를 유지하도록 조절하는 모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작업 관리자처럼 활성 작업을 최소화하거나 종료하고, 시스템 상태를 최적화하는 모드)


감정과 나를 강하게 동일시하는 대신, 명상이나 마음챙김 훈련을 통해 ‘관찰자 시점’을 반복적으로 취하게 되면, 뇌는 해당 모드(‘배경 자아’처럼 느껴지는 상태)를 더 쉽게 활성화할 수 있도록 신경 회로를 재조직합니다. 이는 뇌가 스스로를 더 유연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기 위한 ‘자기 최적화’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야 비로소 꿈꾸는 중에는 너무나도 정상적으로 보이고, 자연스러웠던 꿈에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 나우바이어는 그의 책에서 우리가 Lucid Living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삶은 아주 단순하다. 꿈을 꾸거나, 꿈에서 깨거나. 그 두 가지의 반복일 뿐이다. - 동구, <비밀수집가>)

월요일 연재
이전 25화I. 혼내기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