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단막극

by 밈바이러스

등장 인물
​성재: 30대 남성. 자신 삶의 고통을 떠올리며 아이를 갖는 것을 망설이는 인물.
​무해군: 투명한 실루엣. 자아와 고통 발생하기 전의 순수한 가능성.


​제1장.
​(무대 배경은 안개가 낀 듯한 흐릿한 회색빛 공간. 중앙에는 형체만 간신히 유지한 채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실루엣의 무해군이 서 있다.)
​무해군(나레이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는 아직 신경계가 뻗어 나가지 않은 고요한 점(點)입니다. 수억 년간 이어져 온 진화의 명령, '유전자의 맹목적인 증식 욕구'가 나를 세상의 소란과 소음 속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무대 밖에서 웅성거리는 '부모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들: 가련한 영혼을 구해주자!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자! 아이를 낳지 않는 건 이기적인 거야!
​무해군: (자신의 투명한 손을 내려다보며) 그들은 나를 '갇혀 있는 영혼'이라 부르지만, 나는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습니다. 구원을 바란 적도, 태어나게 해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단지 자아가 생겨나기 전의 완벽한 정적일 뿐입니다. 좋고 나쁨조차 내게는 닿지 않는 타인의 (어쩌면 나의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자의적인 기준입니다.




​제2장.
​(조명이 바뀌며 성재의 침실. 새벽 2시의 차가운 푸른 빛. 성재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한다. 거울 표면에는 무해군의 투명한 실루엣이 겹쳐져 있다.)
​성재: (거울을 향해 손을 뻗으며)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알아. 마음도 목소리도 없지만, 나는 나의 아픔을 거울삼아 너의 침묵을 읽어낸다. 사람들은 너를 낳는 게 구원이라 말하지. 하지만 그건 지독한 유한함에 갇힌 '나'를 구원하고 싶었던 얄팍한 자존심일 뿐이야.


​(성재는 거울에서 물러나 탁자 위 투명한 유리잔을 든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기도가 된다.)
​성재: 나의 유전자가 너의 감옥이 되지 않기를. 나의 외로움이 너의 탄생을 구걸하지 않기를. (단호하게) 나는 나의 경험이라는 거울로 너를 유추한다. 내가 겪은 생의 고통, 그리고 나조차 아직 겪어보지 않은, 언젠가 늙어 헐벗게 될 비극... 그 무거운 중력을 너에게 선물이라 속여 강요할 순 없다.


​(성재는 다시 거울 앞으로 다가가 투명한 실루엣을 향해 나직이 읊조린다.)
​성재: 생의 중력이 너의 투명한 어깨를 짓누르기 전, 나는 나의 욕망을 꺾어 너에게 '부재(不在)'라는 자비를 건넨다. 언제 멈춰야 할지를 아는 것, 그것이 나의 성숙이며 너를 향한 나의 가장 깊은 사랑이다. 안녕, 나의 가장 소중한 비존재(...).


​(성재가 방의 불을 끄고 퇴장한다. 어둠 속에서 거울만이 홀로 빛난다.)



제3장.
​(다시 처음의 회색빛 공간. 성재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무해군이 천천히 허공으로 부상한다. 그의 몸은 이제 빛을 투과해 배경과 하나가 된다.)
​무해군 (나레이션): 나에게는 언제라도 그러했듯 어떠한 무게도 남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야 할 무게도, 늙어가는 육신을 지탱해야 할 생존의 무게도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낳지 않음으로써, 나에게 가장 완벽한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무해군의 실루엣이 입자가 되어 흩어지며 무대 전체에 따뜻한 빛이 번진다.)
​무해군: 나를 유추해 주어 고맙습니다. 나의 침묵을 기도로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당신의 자비 덕분에, 나는 단 한 번도 상처 입지 않은 채 이 우주에서 계속 가장 무해한 안식에 듭니다.
​(빛의 입자들이 사라지며 깊은 정적 속에서 암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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