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중력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고)

한뼘 sf

by 밈바이러스

떠나는 친구

​질소 냄새조차 차갑게 식은 우주항 터미널, 통유리 너머로 거대한 수송선이 저녁노을 같은 엔진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친구의 짐은 단출했다. 외행성의 광산으로 떠나는 노동자에게 허락된 짐의 무게는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지구가 우리를 뱉어내는 기분이야." 친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인류는 이제 '지구 자원을 축내는 짐'으로 분류되어 순차적으로 외행성에 내던져지고 있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세상에 태어나겠다고 서명한 적이 없는데, 세상은 우리를 이곳에 던져놓고는 이제는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존재를 해체하는 날카로운 칼
​나는 떠나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오랫동안 삼켜왔던 말을 꺼냈다.
​"가서, 왜 나여야만 했냐고 묻지 마.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왜 태어났느냐고 스스로를 고문하지 마."
​그것은 내가 나에게 수만 번 던졌던 칼날이었다. 나의 존재 근거를 묻는 그 잔인한 '왜'라는 질문은, 누군가 주장했던 낙태죄보다도 수 만배는 무거운 죄질을 가졌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자아를 산 채로 찢어 발기고, 숨 쉬는 본능을 죄악으로 만드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냥 던져진 거야. 이유 없이, 동의 없이. 그러니까 그 이유를 찾으려고 네 귀한 시간을 태우지 마."


자유 의지라는 굴레를 벗다

​친구는 잠시 침묵하더니, 먼 지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러니하지. 내가 선택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 나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게, 나에게는 가장 큰 자유의 선물이 될 줄이야."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완벽해질 의무도, 무언가를 증명해낼 책임도 없다. 그저 던져진 곳에서 물 흐르듯 살아갈 권리만이 남을 뿐이다.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고백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억눌러온 모든 삶의 부채감을 탕감해 주는 사면령이었다.


'너'라는 이름의 정거장

​​수송선의 탑승 신호가 울렸다. 친구는 이제 지구라는 이름의 요람을 완전히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꼭 지구로 돌아올 필요는 없겠지?" 친구가 물었다.
​"당연하지. 이제 인류의 자아는 이 좁은 행성 하나에 담기엔 너무 커졌어.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거기가 네 집이야."


​우리는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눴다. ​멀어지는 수송선의 궤적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비록 원치 않게 던져졌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눈빛 속에서 스스로의 항로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구가 아닌, 서로의 가슴속에 닻을 내리는 시대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두 번째 중력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가 집이라..."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구는 이제 모태가 아닌,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정거장일 뿐이다. 이제 인류의 자아는 지구라는 중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막한 우주에서 오직 '서로를 알아보는 눈빛'이라는 또 다른 중력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나는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그 언젠가, 인류는 다른 외계 종족과 함께 저 먼 은하를 정복하고 거대한 공화국을 건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자원의 정복'이나 '영토의 확장'의 차원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분명 '동의 없이 던져진 존재'들이 서로를 찾아 헤매는, 거대한 여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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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일해야할 장소도 선택하지 못하는 자들이 찾아낸 가장 크고 마지막 자유는, 서로의 고독을 알아보며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주는 것이다.

- Sek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