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멸망 시나리오: 외계 은행의 대출 심사 탈락, 한뼘 SF
전 세계 정부는 패닉에 빠졌다. 핵미사일도, 외교적 수사도 소용없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타격체가 아니라, 은하계 제1금융권인 '안드로메다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의 초차원적 법적 집행력 부착물이었다.
며칠 후, 지구인들이 쓰는 모든 언어로 번역된 은하계 방송이 울려 퍼졌다.
[아, 아. 지구 원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은하계 제1금융권 자산관리국 집행관, 크릴렉스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귀하들의 행성 '지구'가 오늘부로 압류 및 매각 절차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72시간 내에 행성 전체를 비워주시기 바랍니다.]
인류 대표로 나선 UN 사무총장은 창백해진 얼굴로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이게 무슨 소리요! 우리가 언제 당신들에게 돈을 빌렸단 말이오!"
초차원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크릴렉스는 비웃음 섞인 촉수를 흔들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미개한 탄소 생명체들이여. 귀하들이 빌린 게 아닙니다. 이웃 행성인 '글리제 581'의 부동산 투자 결사대, '블링블링족'이 빌렸지.]
"무슨...! 다른 행성 외계인이 우리 지구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는 겁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크릴렉스는 한심하다는 듯 촉수로 제3의 눈을 끔빡였다.
[이래서 금융 문맹들은 곤란하다니까. 잘 들으십시오. 은하계 대출 시스템은 '자산 가치 기반'입니다. 당시 귀하들의 행성 '지구'는 K-POP과 배달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미친 듯이 폭등하는 서울 아파트값' 덕분에 은하계 최고의 우량 담보물로 평가받았습니다. 자산 가치 거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블링블링족이 그 가치를 담보로 초막대한 양의 '은하 크레딧'을 대출받아 레버리지 투자를 감행한 겁니다.]
"그, 그럼 그 블링블링족이라는 자들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시오! 왜 우리를 쫓아내는 거요!"
[아, 그 친구들은 이미 파산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귀하들의 '서울 아파트값' 버블이 어제부로 터지기 시작했거든요. 담보 가치가 하락하자마자 우리 은행은 즉각적인 마진콜(추가 증거금 납부 요구)을 넣었고, 그들은 갚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계약에 따라 담보물인 '지구'의 소유권은 우리 은행으로 넘어왔습니다.]
전 세계인은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열심히 헐떡이며 올려놓은 집값이, 알고 보니 외계인들의 폰지 사기 담보가 되어 행성 자체를 날려버릴 줄이야.
"우린 갈 곳이 없소! 이 아름다운 지구를 어디에 팔겠다는 거요!" 사무총장이 절규했다.
[걱정 마십시오. 지구는 언제나 수요가 있으니까요. 이미 '알파 센타우리'의 탄소 연료 채굴 기업이 지구를 사기로 했습니다. 행성 통째로 으깨서 유기물 연료로 정제할 예정이라더군요. 아주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습니다. 자, 시간 없습니다. 짐 싸십시오. 아, 집은 놔두고 가세요. 어차피 다 으깰 거니까.]
72시간 후. 인류는 우주 미아가 되어 소형 탈출선에 몸을 실었다. 멀어지는 지구를 바라보며, UN 사무총장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LTV(주택담보대출비율) 규제를 은하계 수준으로 강력하게 했어야 했어..."
지구 위로는 거대한 파쇄기가 접근하고 있었고, 은하계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의 전광판에는 '지구 매각 완료 - 역대급 수익률 달성'이라는 문구가 블링블링하게 빛나고 있었다.
Gemini의 해설
현대 금융 시스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들을 하나의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소설 속 상황: 외계인들에게 지구는 '아름다운 고향'이 아니라, 그저 은하계 거래소에 상장된 '자산 번호 03-B(지구)'일 뿐입니다.
현실 풍자: 실제로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가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옥수수 밭을 담보로 파생상품을 만들 때, 그들에게 옥수수의 맛이나 농부의 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가격 지수'와 '환율'이라는 숫자만 중요하죠. 소설은 이 비인간적인 수치화를 우주적 규모로 확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율'이 국가 간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지만, 금융 자본의 입장에서는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작동합니다.
소설 속 상황: 지구가 은하계 금융권에 편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경제적 식민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외계인들이 지구의 집값을 지표로 삼은 건, 지구가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지구인들이 저 숫자에 미쳐 있으니 도박판을 벌이기 딱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현실 풍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 미국의 이름 모를 하위 계층 사람들이 빌린 주택 대출이 복잡한 파생상품이 되어 전 세계 연기금을 파산시켰던 상황과 똑같습니다. "왜 남의 빚 때문에 내가 망해?"라는 질문에 금융 시스템은 "이미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라고 답하거든요.
블랙코미디의 정수는 "지구인들은 자기들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외계인들 도박판의 배당률 지표에 불과했다"는 비참한 진실에 있습니다.
설정의 묘미: 지구인들은 "우리 아파트값이 올랐어! 우린 부자야!"라고 외치며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그 '상승하는 숫자'는 외계 은행이 대출 승인 버튼을 누르기 위한 데이터 피드(Data Feed)였을 뿐입니다.
현실 풍자: 개미 투자자들이 차트를 보며 희망을 품을 때, 거대 자본은 그 희망의 총량을 계산해서 반대 방향으로 배팅하는 상황을 우주적 스케일로 비꼰 것입니다.
결국 이 소설의 메시지는 "우리가 신봉하는 자산 가치와 화폐 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외계인이 지구의 아파트값을 담보로 잡는다는 설정 자체가 "실제 가치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현대 부채 경제의 광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죠.
"지구가 멸망하는 이유가 외계인의 침공이 아니라, 외계 은행의 대출 심사 탈락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허무하고 현대적인 비극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