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론자 Dec 08. 2020

민수 이야기(1/5)

새내기 주민수

0.
"너 또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지?"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그 녀석이 말을 건네 왔다.

1.
통금 전에 기숙사에 들어가려고 피시방에서 나오는데 바람이 찼다.
"이게 맞는 거냐 주민수?"
나는 점퍼의 지퍼를 죽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소리는 안 들렸겠지만,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허공에 입술을 빠끔거리는 꼴은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2.
스무 살 대학생인 나, 주민수의 오늘은 '아무것도 안 했다'로 요약된다. 하나 있는 오전 수업을 대강 때운 뒤, 기숙사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기숙사 통금 직전까지 게임을 했다. 그리고 기숙사 침대에서 뒹굴며 유튜브를 보는 중이다.

3.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이끌려 한 영상에 도달했다. 한 유명 BJ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다.
“목표 있을 거 아니야 목표. 자아실현 해야지.”
언젠가부터 나가지 않고 있는 농구 동아리, 복싱 도장 등이 머릿속을 휙휙 지나쳤다.

4.
요즘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일단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본다. 마감일 전에는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 들어 여유가 있다.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게임을 한다. 마감일이 되어서야 잠시나마 현실을 깨닫는다. 몇 시간 안으로 뚝딱 되는 일이면 대충 해결하고, 안 되는 일이면 그냥 없었던 일처럼 흘려버린다. 도망쳐버린다.

5.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고 대학도 같이 들어온 친구가 있다. 혼자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성중이었다. 게임 두 판을 같이 했다. 난 더 할 생각이었는데 성중이가 나를 피시방에서 끌고 나와, 싸고 맛있다는 분식점에 데려갔다. 그러고는 떡볶이 2인분에 튀김 2인분을 주문하고, 어묵 국물을 떠다 줬다. 종이컵 너머로 전해지는 어묵 국물의 열기는 따끈했다.


먹으면서, 대학교에서 그간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중이는 충실하게 학점도 잘 받으면서 잘 놀고 다니는 모양이다. 오늘 아는 체해준 게 고마워 내가 계산했다.

6.
성중이랑 기숙사에 돌아가는데 성중이가 도서관에 가잔다. 공부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자기계발서를 몇 권 꺼내 성중이 옆에 앉았다. 한두 쪽 읽으니 피곤해졌다. 도무지 집중이 안 됐다. 책에 집중하는 척 노래를 들으며 성중이가 공부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7.
기다리다가, 심심해져서 플래너에 내일의 계획을 세웠다. 오전 수업 하나 있는 화요일. 알뜰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다짐을 플래너에 기록했다. 또, 빼곡하게 계획을 짰다. 흘낏 보니 성중이가 짐을 싼다. 나도 플래너를 가방에 넣고 일어선다.

8.
다시 기숙사. 핸드폰을 보다 늦게 잠들어 놓고, 그대로 오전 수업에 결석해버렸다. 사실 알람에 깨긴 했는데 ‘어차피 가도 못 알아들을 텐데 간다고 뭐가 바뀌어?’하면서 그대로 다시 잤다. 오늘 하루가 끝날 무렵 어제 세웠던 무수한 계획들이 떠올랐다. 계획 이수율 0%. 맞다. 이게 나다. 하하하.

9.
중간고사 1주일 전
그래도 일주일이면 넉넉하게 남았다고 생각했다. 안심이 됐다. 피시방에 들어갔다.

10.
중간고사 3일 전
오늘부터 게임은 일절 금지다. 한 과목당 20시간 공부할 시간이 남아있다. 이 시간 잘만 쓴다면 B+ 평점까지 무리 없다.

11.
중간고사 전날
피시방은 안 갔지만, 공부도 안 했다. 재밌는 영상, 재밌는 만화가 많았다. 낄낄대면서 보고 싶은 것 다 봤다. 지금 돌아보면 억지로 낄낄댔던 것 같다.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12.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미분적분학2.
적어도 수업 시간에 '들었다'고 할 수 있는 과목. 평균 60점에 내 점수는 40점. 쉬운 문제에서 실수가 있어 살짝 아쉽다.

일반물리 2
문제의 화요일 오전 과목. 학기 초에는 수업을 따라가다가 도중에 낙오돼 버렸다.
평균 50점에 25점. 평소 귀찮음에 출석도 과제도 안 했다. 이대로면 C 평점도 과분하다.

C언어
비중이 어느 정도 큰 과제를 몇 번이나 안 했다. 한편 벼락치기에 실패해서 평균점에 한참 미달이다. 숙연해진다.

13.
중간고사 결과야 어쨌든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본가로 돌아왔다. 유행하는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밥도 먹었다. 가볍게 술도 한잔 걸쳤다.

14.
현수
십자인대 때문에 신체검사 5급 판정을 받았다. 그 때문에 2년을 벌었다며 별 고민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찾을 거야!’ 하며 대학교를 휴학했다. 요즘에 알바를 구했단다.
대단


한 녀석.

15.
형훈
1등급 인생. 부모님, 인간관계, 대학 등 모든 게 1등급이다. 이 녀석은 불안 요소란 게 하나도 없단다. 취미로 C언어를 공부하는 중이다. 심지어 국가유공자로 4급 판정.
완벽한 녀석.

16.
석영
0.1% 금수저다. 하고 싶은 것 다 즐기고 갖고 싶은 것 다 누리는 중. 요즘은 제과 제빵이랑 드럼이 그렇게나 재밌단다.
부러운 녀석.

17.
친구들과 헤어지자마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느낌이다. 어쩐지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쉽더라니.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밤길을 걷는데 내 처지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점 관리를 해야 한다. 당장은 이것밖에 없다.

18.
이번 학기 평점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하나, 기숙사. 우리 학교 기숙사는 평점 순으로 뽑는다. 통학하기에는 좀 멀고 자취는 비용이 좀 세다. 둘, 전공 진입. 1학년 때의 평점은 전공 진입과 관련된다. 원하는 과로 진입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평점을 받아둬야 한다. 생각도 않던 과에 떨어지는 건 좀 싫다. 할 게 확실히 정해졌다.

19.
‘아직 바꿀 수 있어. 만회할 수 있어.’
취해서 그런지 행복회로가 쌩쌩 돈다. 나는 열심히 할 거고, 생각하는 대로 잘 풀릴 거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내 방 내 침대에서 푹 잤다.

20.
지하철과 버스를 환승해가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답답했다. ‘할 수 있을까?’라기보단, ‘내가 할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이 이야기는 5부작으로, 민수 이야기(2/5)에서 계속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