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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론자 Dec 08. 2020

민수 이야기(2/5)

방황하는 민수

21.
‘열심히 해보자’는 다짐은 C 언어 과제를 마주하자마자 사르르 녹아버렸다.

22.
화요일 오전수업, 일반 물리. 시간이 너무 안 간다. 교수의 사각지대에서 만화를 봤다.

23.
요즘 부쩍 피곤하다. 3시에 있는 미적분 수업, 빠진 적 한번 없었는데 낮잠 자느라 안 갔다. '하루쯤은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24.
C 언어 과제
미루고 미뤘더니 이틀 남았다. 스스로 하는 건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지난 두 번의 과제는 안하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대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돈 주고 코드를 샀다.

25.
교양과목 과제
미루다가 얼렁뚱땅했다. 평가 기준에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26.
기숙사 방이 점점 더 난장판이 돼간다. 한 사람의 집 상태는 그의 정신 상태를 표방한다는데, 정말 맞는 말 같다. 방의 한구석이 쓰레기로 가득 찼고 각종 유인물은 낱장이 되어 방 곳곳에 흩어져 있다. 요즘 옷가지들이 침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웅크리고 잔다.

27.
오후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가는 길. 석영이한테 같이 게임을 하자고 할 요량으로
전화를 건다.
"야 뭐하냐"
"드럼 치러 간다."
"그것이 네 자아실현의 수단이냐?"
"그래 임마, 너도 자아실현 좀 해"
"난 다이아(게임의 등급)나 가야겠다. 게임이 내 자아실현인가 봐"

오늘도 한참 동안 롤(게임)을 했다.

28.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기말고사까지 단 4주 남았다. 중간고사 때보다도 더 엇나가는 중이다.

29.
오후 8시, 갑자기 졸렸다. 자고 일어나니 새벽 3시다. 오늘 마감인 과제가 있다.
‘한번 해보자!’하며 찬물 샤워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5분 정도 과제를 하다 보니 심심해졌다. 심심하면 안 되는데 심심했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을 하다가, 나른해져서 눈을 감았다. 아침 10시까지 내리 잤다. 겨우 일어나 수업에 갔다.

30.
오전수업을 이틀 연속으로 안 갔다. 일어날 수 있었는데 그냥 12시간씩 자버렸다. 그런데 또 졸리다.

31.
정말 위태롭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실감이 안 난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상이 간다. 뻔히 보인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이게 정말 위험한 거야’라 생각했다.

32.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불안해서 미치겠다. 그럼 과제든 뭐든 좋으니 뭐라도 하면 좋지 않겠냐고? 너무 막막하다. 할 것이 너무 밀려 있다.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33.
고등학교 때는 매뉴얼이 있었다. 다니라는 학원에서 주어진 숙제만 하면 점수가 어느정도 나왔다. 지금은 매뉴얼도, 나를 지켜보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34.
정신을 못 차린다. 해야 할 것이 백이면 하나를 해놓고 각종 익명 커뮤니티, SNS를 순회해가며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 댄다.

35.
요새 한번에 세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 불안해서 자꾸 깬다.

36.
4인 4실. 독방이라 개인공간이 있다. 한없이 자유로운 공간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방에 갇혀 버리는 것을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금, 토, 일 삼 일간 기숙사 방을 나가지 않았다.

37.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38.
나 좀 공부시켜줘

39.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

40.
의존하고 싶다. 자꾸 의존할 사람을 찾게 된다. 내 인생과 책임을 양도할 수만 있다면.


민수 이야기(3/5)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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