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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론자 Dec 08. 2020

민수 이야기(3/5)

또 다른 민수

41.
나는 필사적으로 온라인상에서 의존할 만한 사람을 찾았다. 오프라인에서는 더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정신병인 듯한 음울한 나의 현 상황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42.
공부 앱, 랜덤 채팅, 익명 커뮤니티를 가리지 않았다. 나를 공부시켜주거나 내 일상을 지켜봐 줄, 감시해 줄 만한 사람을 찾았다.

43.
끝끝내 의존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한 나는,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꺼버리고 누웠다.
시시껄렁해. 마침내, 내 세계는 마지막 빛깔을 잃었다.

44.
길고 긴 잠이었다. 이렇게 깊은 잠은 오랜만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

45.
"누구야?"
방에는 분명 나 혼자일 터인데. 나는 방어적으로 되어 그 목소리를 경계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외부적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46.
"너 계속 찾고 있었잖아. 의존할 사람. 네가 나를 만든 거야."
의존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한 내가 또 다른 인격을 발현시켰단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 이 녀석이 나의 제 2인격.

47.
3일 만에 샤워를 하고 기숙사 방에서 나가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었다. 혀랑 입천장을 데어가며 뜨거운 줄도 모르고 순대국밥을 허겁지겁 입에 떠 넣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런 나를 그 녀석이 괜찮다며 다독여줬다.

48.
그 녀석이 나에게 매뉴얼을 짜주었다. 수면시간, 식사 시간이 딱딱 정해져 있었다. 계획이 빡빡했다. 그 녀석을 믿고 1주간 철저하게 메뉴얼을 따랐다. 나름 여유시간도 주어지고 그랬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충실감을 맛봤다.

49.
그 녀석이 나타난 이후, 누가 지켜봐 주는 느낌이 들어 심리적 안정감을 회복했다. 혼자 도서관도 가고, 농구 동아리도 다시 나갔다. 독방은 더 이상 나를 가두지 못했다.

50.
그 녀석도 잠을 자나 보다. 내가 쉴 때 그리고 가끔은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51.
그 녀석이 나타난 지 일주일이 되었다. 그가 다음 일주일의 매뉴얼을 짜주고 있다. 전주보다 많아진 그 양에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내 안에서 도망치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방출된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발악을 해댄다.

52.
충실감은 잠깐이었다. 즉각 즉각 나오는 결과와 보상이 없다 보니 또다시 재미가 없다. 시시해졌다. 무엇보다 게임을 못 한지 너무 오래됐다.

53.
자아실현은 매슬로 5대 욕구의 맨 꼭대기 층을 차지한다. 손을 높게 뻗어도, 발돋음 해도, 껑충껑충 뛰어도 닿지 않는다. 나에게는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한다. 시간은 적고 할 것은 많다. 자아실현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여유가 없다. 그와 일주일을 보내면서 ‘여유를 지워야 겨우 사는 건가’하는 생각이 든다.

54.
또 도망쳐버렸다.
그 녀석이 잠든 새를 타 석영의 전화를 받고 게임을 하러 피시방에 왔다. 같이 게임을 하는데 재미가 없었다. 두 판 하고 나왔다.

55.
피시방에 간 건을 알게 된 그 녀석이 발끈했다. 나는 나 몰라라 하는 자세를 취했다. 더나아가, 그 녀석에게 ‘나의 몸의 주 인격이 되어 줄 수 없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한심하다는 투로 ‘정말 그래야 되겠냐’고 되묻는다.

56.
마지막으로 그에게 부모님에게 받은 것들을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우리'의 부모이니까. 몸과 인생의 양도가 이뤄졌다.

57.
암전. 이곳은 깜깜하다.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독방에서 누리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운 자유를 누린다. 이곳에서는 의식의 끔과 킴이 자유롭다. 의식을 끄고 있다가 사유를 하거나, 그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 슬쩍슬쩍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는 그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는 것을 같이 본다(시야를 공유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58.
그 녀석이 무엇을 하는지는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초점이 맞지를 않는다.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쓴 느낌이다.

59.
그는 가끔 나를 불러내어 여유 시간을 보내도록 했다. 동시에 그는 자기의 의식을 차단해 놓고 나름의 휴식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피시방에 갔다.

60.
갑자기 이 녀석이 하루 동안 나에게 몸을 맡겼다. 하루 정도 쉬고 싶단다. 냉큼 피시방에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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