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1 남원 실상사

간단 여행기 8

by 호랑이아저씨

절이나 성당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주류 커뮤니티가 있어서 그곳에 속해야만 한다는 강박을 주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쉽게 말해 그냥 문이 열려있다는 거다.


열려 있다는 건 종교를 접하는 믿음없는 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그들만의 커뮤니티, 그들만의 믿음체계... 이런 것들이 어떤 종교의 주요 요소가 되는 순간 적극적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최소한 나는 그렇다.


남원 여행은 즉흥이었다.


여행이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 어딜가나 너무 추웠을뿐만 아니라... 연말연시라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고 사람들은 집으로 들어가버린 탓에 도시가 적막했다.

서로 다독여주기보단 긴장감만 높아졌다.


먼길 나서서 지리산 인근까지 내려왔는데 아쉬움이 없을리 없다. 어떻게든 알찬 루트를 만들기 위해 찾은 곳이 실상사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가 몇번을 불타고 다시 지어졌다는 절. 한자명은 모르겠으나, 이름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은 휑하다. 부지는 넓은데 마땅한 건물은 없다. 전날 갔던 백양사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실상사 대웅전과 석탑, 석등

그럼에도 절은 절이다. 칼바람이 지리산골에 부는데도 어딘가 푸근한 느낌이 든다. 귀가 떨어질 것 같아도 경내라면 몇시간이고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절에 오면 언제나 그렇듯 삼배를 올린다. 나는 뒤에서 무심히 지켜보다가 너의 삼배가 마무리되는 타이밍에 맞춰 간단히 목례를 올린다. 석탑을 돌아본다. 소원도 빌어본다.

휑함이 조금은 채워진듯하다.


어둑어둑 해가 넘어가자 저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온다.

보통 달리기 실력이 아니다. 저기 떨어진 논두렁을 돌아 오는데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한참을 눈으로 좇는다.

'저 사람봐 무슨 이 추위에 달리기를 하네 대단하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사천왕문 앞에서 우리와 마주친다. 나도 모르게 뭐하는 사람인가 싶어 빤히 쳐다본다.

그러자 갑자기 합장을 하신다. 스님이다.

이제보니 어딘가 승복스러운 복장이다.


나는 어쩔줄몰라 고개숙여 인사하고

너는 그것마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달리기하는 스님은 상상도 못해봤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또 달리기만큼 정신을 비울 수 있는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이 추위에.

그 스님에겐 달리기가 기행이 아니라 수행이었던 거다.


우리는 말 거는 이 하나없이 각자의 수행에만 매진하면 되는 실상사를 벗어나 숙소인 선돌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