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17 제주도 서남해안

간단 여행기 9

by 호랑이아저씨

이제 여길 다녀온지도 참 오래 되었다.

앞으로 계속 이 여행기를 이어나가게 된다면 현재형 시제를 쓸 수 있을테지만

이것처럼 옛날 얘기를 써야할 때는 기억나는 부분만 과거형으로 쓸 수 밖에 없을테다.


아마 이것은 첫번째나 두번째 제주도 여행이었을 것이다.

둘다 취준생이었을까? 정확히는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시간여유가 지금보단 많았다.

왜 더 바빠졌을까? 문득 궁금하다.


제주도는 봄이 빨리 온다.

공항에서 어떤 빨간색 버스를 타고

애월보다 조금 더 가서 내렸던 것이 기억난다.

시퍼런 바다에서 바람이 불었고, 저 멀리 뻗어 있는 밭들이 초록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걸었다.

하루에 2만보, 3만보는 깔고 가야했다.

그렇게 걷고도 지치지가 않았다.

길가에는 간간히 유채꽃이 피어올라있고, 녹색과 노란색, 흙색과 하늘색이 막 섞여있었다.

정말로 봄이었다.

너도나도 햇살 받으려 서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알다시피 올레길이라는 게 딱히

그렇게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다.

계속 이어진 길이 있다는 거.

종종 좋은 경치가 펼쳐진다는 거.

그거 말고는 가끔은 지루하기도 하다.


무슨 말을 하면서 걸었을까?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상상하긴 힘들다.

그럼에도 이 여행이 기억나는 건

봄, 그것도 정말 갓 깨어난 봄이었다는 것과

동백꽃의 주인공 남녀마냥 그런 몽글몽글한 감정이 생각난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사진이 없다면 이젠 추상밖에 안남았을 기억들이지만

다행히 그 때 찍어둔 사진이 몇 장있다.

분명 아무런 필터를 넣지 않았음에도

뭔가 뿌연 어떤 것이 가득차있는 게 신기하다.

우리는 처음엔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밭으로 길을 틀어 숲속으로 들어갔는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일본군 격납고라던지

4.3. 사건 추모비와 같은 것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제주도의 동쪽보다는 서쪽 그것도 서남쪽이

더 아픈 기억이 많은 땅이었나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또 기억나는 건

해안으로 바로 이어지는 용천

물이 흘러 넘쳐 콘크리트 도로 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뭔가를 씻고 있는 할머니들

그리고 그 위로는 높이 솟은 야자수

알 수 없는 풍경, 무엇인가 장소와 시간이 섞여버린듯한...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더 생경한 장면이 나온다.

지질공원인지 보호구역인지 괴상한 장소였다.

제주도라는 섬이 태어난지 한 500년 밖에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물론 나만 신났고 너는 별로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너는 중문 근처의 절벽에서

파랑새가 있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을 찍던 아주머니께서 우리가 너무 귀엽다며

사진을 찍어가셨고, 우리 핸드폰으로도 사진을 찍어주셨다.


그 이후로도 제주도를 참 많이 다녔지만

그 때처럼 봄 다운 봄을 느끼진 못했다.

아무래도 제주에 1년은 눌러 살아야 다시 느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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