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전쟁 준비 중

by 보부장

나는 "회사는 전쟁터고 회사 밖은 지옥"류의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회사에서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맘 속에 천국도, 지옥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가능하면 어려운 상황을 돌리고 돌려 좋게 생각하려 한다.

게다가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라니. 너무 가혹한 비유라 생각했다. 적든 많든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숫자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금과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표현력이 부족한 탓인가. 아들과 얘기를 하면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 비유를 사용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남자들이 그런진 모르겠지만 우리 아들은 유난히 총, 칼, 폭탄 등의 무기류에 관심이 많다(매우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뾱, 뾱, 작은 흡착판이 달린 총알을 쓰는 너프건으로 유리창 공격을 해대며 좋아하길래 그러려니 했다. 그 나이 때 남자아이들의 흔한 모습이니 말이다. 하지만 중학생 이후 키도 정신도 어중간한 어른이 된 아들은 이제 다양한 총의 이름, 종류나 각 나라별 군인들의 총을 외우기도 하고 분명 장난감이지만 실제와 유사하게 생긴 장난감 총을 "돈을 주고" 구입하기도 한다.

가끔 자기와 취향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는 날, 킬러처럼 큰 가방에 각종 무기들을 담아 나서는 길에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말라고 충고도 해주어야 한다. 워낙 공공질서를 중요시하는 중국에서 검문에 걸려 괜히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살짝 겁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총장난을 하는 모습이 마땅치 않기도 해서이다. 그러면 아이는 후드 티의 모자를 푹 둘러쓴 채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먼 거리를 차라리 걸어가겠다며 집을 나선다. 고독한 킬러의 모습 그대로다.


손으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도 좋아하는 아들은 택배 상자나 포장재로 쓰이는 플라스틱 패널을 이용해서 간단한 칼, 총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자기 방 밖으로는 총 따위를 가지고 나오지 못하게 하니 아들은 방에 콕 박혀서 정확한 사이즈도 , 똑 바른 직선도 하나 없는 설계도를 그리고 거기에 맞춰 총을 만드느라 얼굴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중간고사에 이어 기말고사도, 만화에서 독자들을 웃기려고 나올 법 한 점수가 채점표에 등장했다. 성적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방학 내내 별다른 변화도 없고 하루에 열두 시간 열네 시간씩 늘어만 가는 잠과 나름의 작품들(그림, 종이로 만든 무기류, 쓰레기 포함).

아이와 미래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어야 했다. 물론, 아이는 주제가 “공부”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공부와 성적은 아이가 제일 싫어하는 주제라 어쩔 수 없이 꺼내 든 단어가 전쟁과 무기.

"전쟁에 나가려면 무기가 필요하지 않니?"

아이가 급 관심을 보인다. (물론 숨어있는 주제를 알아채고는 금방 시들해졌지만 엄마가 진지하게 나서니 도망갈 수도 없는 모양새다. 반은 성공이다)



아들아. 지금 너는 어른이 되어 겪게 될 전쟁을 위해 이미 큰 무기를 가져단다.

시간이라는 무기. 네가 좋아하는 총이고 미사일이라고 생각해 보자.

물론 너만 가진 것은 아니야. 누구에게나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지.

사람들이 흔히 전쟁터 라 표현하는 사회에 홀로 서기 전까지, 우리는 그 총에 사용할 총알을 만들면서 전쟁 준비를 하는 거야.

공부며 독서며 사람들과의 교류, 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집중까지. 모든 너의 노력이 총알이 될 거야.

그 총알이 예술적인 것일지 수학 일지 혹은 운동일지 그건 네가 공격하고 싶은 대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 어떤 종류의 총알이든 만드는 방법은 비슷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재료들을 잘 모아서 너의 노력으로 굳히는 거야.

재료들은 너의 경험이나 생각으로 저절로 니 손에 쥐어지기도 하고 네가 직접 겪지는 않아도 선생님이나 엄마 아빠가 손에 얹어 줄 수도 있어.

분명한 건 네가 스스로 재료들을 붙들고 굳히지 않으면 바람에 또 날아가 버리더라고. 그건 엄마 아빠도 도와주기 힘든 일이야.


단단한 총알을 많이 준비해서 사회에 나갔을 때는

사람들이 오히려 너에게 갑옷도 주고 방패도 주면서

너를 자기네 편으로 데려가려고 할 거야.

처음부터 너의 기술이나 실력을 잘 알지는 못해도 전쟁 준비가 잘 되어있으니 잘 싸우겠네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

네가 혼자서도 잘 싸울 수 있다면 굳이 누군가의 팀에 속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야.


물론 네가 준비한 무기가 안 먹힐 때도 있고,

갑자기 총에 문제가 생겨 총알이 안 나갈 수도 있고.

혹은 네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네가 품에 안은 그 무기는

지금 그렇게 아끼는 택배 상자와 검은 절연테이프로 만든 총, 칼 보다

훨씬 너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야.

그러니 어떤 일에도 니 노력을 다해,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미래를 준비해 주겠니?

엄마 아빠가 도울게, 우린 소속을 바꿀 수 없는 오랜 전우잖니.

우리는 매일 겪는 전쟁 속에서 너에게서 용기, 사랑, 책임감이라는 보급품을 지급받고 있는 거란다.





이제 겨우 OMR 카드에 사인펜으로 스스로 칸 채우기를 시작한 아이에게

삶을 전쟁과 무기로 설명해야 하는 이 글이 웃기기도 슬프기도, 또 글머리에 쓴 것처럼 싫기도 하지만

마냥 종이박스로 만든 총과 스파이더맨 가면 안에서 행복해 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이미 전쟁을 겪고 있는 혹은 오늘도 잦은 부상에 힘겨워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글을 써본다 하면 ,

이것도 꼰대 소리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