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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부장 Mar 25. 2022

성령 내리심을 묵상합시다

걸어서 이십여분 되는 출근길. 

별다른 의식적 동작 필요 없이 음악을 들으며 걷기에 딱 적당한 거리와 시간이지만

음악으로 위로를 받거나 힘을 얻는 성향은 아닌지라, 차라리 그 시간이 아까울 땐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알아듣기 어렵지만 도움이 될 거라 믿는 영어 팟캐스트를 듣거나  아이들에게 절대 해선 안된다고 가르치는 행동(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시청)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출근길 동무는 묵주기도입니다. 

가장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자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왠지 묵주기도는 아무도 방해받지 않은 조용한 방에서, 어둠 속에 굳이 작게 촛불을 켜고, 성모상이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경건히 기도를 드려야 할 것 같거든요. 

가끔 방에서 분위기를 잡고 기도를 드릴 때 아이들이 엄마 뭐하나, 빼꼼 문을 열다가도 깨끔발로 조용히 다시 돌아나가는 걸 보면, 기도 시간은 왠지 정중하고 거룩하고, 누구든  방해받아선 안 되는 소중한 시간으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경적이 울리고, 부웅 낮지만 주의를 요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찰캉 찰캉 가게문을 여닫는 소리에 머리를 조심해야 하고, 가끔은 나도 모르게 코를 돌려 킁킁거리게 만드는 고소한 아침 먹거리 냄새가 가득한 출근길은 왠지 기도를 드리기에 적합한 때가 아닌 것 같아, 그 소중한 20분을 저는 기도에 잘 내어드리지 않습니다. 

네, 핑계지요. 

굳이 조용하고 경건한 시간을 내어 자주 기도를 드리지 않으니까요.

레지오 주회가 다가오는 수요일까지 기도가 부족하다 조금 찔리는 마음이 들면  

출근길에 사도신경으로 묵주기도를 열 때가 있습니다. 

주머니에 달그락달그락 묵주를 담은 채 걷기도 하고 혹은, 열 손가락 끝을 한 번씩 꾹꾹 눌러가며 횟수를 헤아려도 좋아요. 

사실 학교를 다닐 때도 깨끗하고 조용한 독서실보다는 

사전이니 교과 서니 여기저기 잡동사니들이 널려있고, 문 너머로 알아들을 까 말까 한 티브이 소리가 왕왕 새어 들어오는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가 더 좋았던 터라 

다소 소란스러운 길거리에서 드리는 기도도, 집중을 하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추적추적 비까지 내리는 오늘, 

한 손에는 우산을 받혀 들고 , 주머니에 넣은 한 손으로는 묵주를 쥐고 

오늘은 영광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묵주기도의 구절 중 ,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신 뒤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불꽃 모양의 혀들이 각자의 머리 위로 내려앉고 , 

곧 그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도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었던 영화와 같은 장면이지요.  

워낙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은총과 누구나 느끼는 사랑보다는, 

사실 개개인에게 눈에 보이게 내려주신 성령, 그리고 다른 지역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능력까지 표현된 그 장면이 저는 참 좋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를 묵상하며 성모송을 가만히 되뇔 때면 

왠지 저에게도 그런 능력이 내려오는 것 같아, 

성령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착각도 듭니다. 

(말이 설은 외국에 살기도 하고, 업무 때문에 뒤늦게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라 그런 능력을 갖게 된 사도들이 더 부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신비를 묵상하며 아무리 진지하게 기도를 해보아도

영화나 유튜브 영상 속의 파란 눈 외국인이 솰라 솰라 하는 말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긴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특정한 능력을 갖게 된 것 외에, 

성령의 내림을 받은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또 거룩했을까요. 

옷이 희어지고, 거룩하게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른 모양이었겠지만, 

성령에 가득한 그들의 얼굴은 세수나 화장 따위로  만들 수 없는 밝음이 있었을 거라 상상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특수 제작된 바늘로 진피층을 자극하여 새로 살이 돋아 광택이 돌게 하는  값비싼 시술을 받은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을까요

제가 기도를 드릴 때마다 ,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성령이 내게 함께 하심을. 

그리고 물이 오른 듯 한 광택을 얻기 위해 일정 기간 다닥다닥 딱지를 얹고 살아야 하는 시슬을 받지 않아도 내가 그들처럼 밝은 얼굴을 갖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오늘 배우고도 내일이면 잊어버리는 영단어를 외지 않아도  

파파고를 집어삼킨 듯 솰라 솰라  네이티브 스피커로 변할 수는  없겠지만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도 저는 제 바람을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네요. 

그래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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