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무너뜨리는 날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다

by 보다라

가끔 아무 일도 없는 날, 숨이 뚝 멎는다. 밥을 먹다 말고, 길을 걷다 말고, 친구와 웃고 있다가도, 어디선가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내 안에서 다시 날뛰기 시작한다.

정확히 어떤 말 때문이었는지, 누구의 표정 때문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날의 공기는 분명했다. 싸늘했고, 무겁게 내 몸을 죄어왔다.

그 사람과 사랑한 지 2000일 되던 날이었다. 그를 보내고도 혼자 작은 축하를 준비하던 그날. 그날 나는 믿었던 사람들의 등을 보았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믿었던 사람들이 천천히, 그러나 아주 단단하게 내 쪽 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다.

그저 나만 잘못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어느새 날 경계하고, 날 의심하고, 날 지워 내려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이 말했던 “도와주겠다”는 말은 사정 앞에서 방향을 바꿨다. 말이라는 건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의 얼굴도 그렇게 뒤집힌다는 걸 처음으로 배웠다.

그날 이후 나는 무섭고 억울하고, 참담했다. 왜 나는 죽은 사람의 곁에조차 머물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했을까. 왜 이별 뒤에도 내가 죄인이 되어야 했나. 마치 내가 그 사람 인생에 괜히 끼어든 손님이었던 것처럼. 나는 말을 잃었다. 그들이, 나를 몰아붙였다.

법원에서 편지를 받고 나서야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정리’하려 하는지 알게 됐다. 그날부터 나는 법 앞에서 ‘가짜 아내’가 되었고,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몰렸다. 그날 그들을 내가 혼자 사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그 사람의 짐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마치 그 사람을 내가 훔쳐간 것처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내가 뭘 그렇게 빼앗았지?”

“왜 나를, 이토록 잔인하게 밀어내는 거지?”

나는 그날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빼앗은 적 없었다. 오히려 모든 걸 잃은 사람이 나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에겐 빼앗으려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가짜 가족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진짜 무너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 위에,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배신이 무너져 내리며, 나는 그 어떤 발 디딜 곳도 없는 허공에 떨어져 살아 있다는 감각마저 사라졌다,

그전 까진 친구들 덕분에 겨우 숨을 쉬었고, 납골당에 가서 울고 또 울며 버텼고, 가끔은 웃기도 했다.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흐릿해졌다. 나는 아내가 아니었다. 며느리도 아니었고, 가족도 아니었다. 그냥 침입자처럼 여겨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걸었는데, 나는 가장 밖으로 밀려났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시간이, 마치 잘못된 기억인 것처럼 지워졌다.

그날 오후, 정말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조여 오고, 바닥이 꺼지는 것 같았다.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데 숨은 쉴 수 없었다. 살려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부랴부랴 병원에 갔다. 불안장애 진단을 받고 처방전을 받았다. 약을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이 약이 없으면 나는 이제 버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마음이 병들었는데, 몸이 먼저 무너졌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괜찮지 않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녁이 되어 작은 케이크 하나, 초 하나 그리고 술을 준비했다. 축하라고 부르기엔 너무 초라했지만, 그래도 그날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사랑한지 2000일, 우리만의 날이었다.

케이크 앞에 앉아 촛불을 붙였다. 원래라면 둘이 함께 웃고 있어야 할 날이었다. 2000이라는 숫자에 놀라며 서로를 껴안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혼자였다. 너무 억울했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혼자여야 했을까. 왜 이렇게 소중한 날조차 빼앗기듯 맞아야 했을까.

나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가슴속 깊은 데 까지 불을 붙였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굳이 참지 않았다.

눈물이 흘러 케이크 위로 떨어질까 손등으로 급히 닦았다. 억울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만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지. 왜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조차 누군가에게 부정당해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과의 시간은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었고, 좋은 기억만이 내 안을 버티게 했다. 그래서 나는 케이크를 켜고, 잔을 들고 이 방안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이다.

촛불이 이내 꺼졌다. 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고, 남은 건 먹다 만 케이크와 빈 술잔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속삭였다. “축하해, 우리.” 그 말은 울음에 젖어 흐릿해졌지만, 그날 나는 끝까지 그 말을 붙잡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약 없이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수면이라는 가장 평범한 일이, 약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해졌다. 1년이 훌쩍 넘은 지금 까지도.

나는 새벽마다 깼다. 약을 먹고 잠에 들지만 2시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눈을 뜨면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눈은 떠졌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고, 이불속은 차가웠고, 기억은 낮보다 새벽에 더 선명했다.

밥을 먹고, 약을 먹고, 침대에 눕는 것. 그게 나의 하루였다. 죽지 않기 위해 필요한 루틴이었다.

낮의 나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사실은 숨 쉬는 것도 벅차서 낮에도 중간중간 약을 들이켰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친구들과 웃는 자리에서도 문득 조용해졌다.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함께 사랑했던 사람들마저 나를 밀어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그들은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슬픔을 나누는 대신, 거리를 두었고, 끝내는 내 자리를 지워버렸다. 내가 그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그들에겐 아무 의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은 너무도 무서웠다.

무서운 건, 그 사람 없는 지금이 당연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곁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마치 자연스러운 일처럼 굳어져 가는게 두려웠다.

더 끔찍한 건, 그 사람과 함께였던 내가 어느새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지워져 가는 감각이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아팠다.

내가 가장 무너지는 곳은 차 안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누구의 위로도 필요 없는 완전한 고립의 공간. 운전대를 잡은 채 울었고, 신호대기 중에도 울었다. 차 안에 흘러나온 익숙한 멜로디 하나에, 그 사람과 함께 듣던 노래 한 구절에, 눈물이 얼굴을 덮기까지는 단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도로 위의 차들은 멀쩡히 흘러가는데 나는 도로 한복판에 혼자 고장 난 것 같았다. 비상등을 켜지 않은 채 멈춰 선 마음. 나만 시간에서 이탈해 버린 것 같았다. 차 안에서 무너진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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