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듬 Jun 29. 2018

우리는 가까워지는 중입니다

교실 속 이야기

학기 초부터 ㅁ은 평소 나의 말이나 행동에 그다지 영향을 받는 녀석이 아니었다. 항상 듣는 둥 마는 둥, 친근하게 다가가 말 걸면 "네" 하면 끝나는, 무덤덤한, 눈도 한번 잘 맞춰 주지도 않는 시크한 남자 중학생. 공부도 그럭저럭, 뭐든지 그럭저럭 정도인 녀석은 무슨 일에든 의욕적이지 않고 기운이 쭉 빠져 있어 보여 내 시선을 끌고는 했다.


체육대회 날. 평소 농구를 즐기던 아이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던 ㅁ이 농구 선수로 출전하겠다고 나섰다. 관심도 의지도 없어 보였던 ㅁ이 단체상이 걸린 종목에 자진하여 나서는 모습이 내 눈엔 무척이나 신기했다.


"ㅁ, 농구 좀 해 봤대?"

"저희랑 농굴 자주 하는 건 아닌데, 꽤 관심 있어 보였어요."

"그래?"


ㅁ은 등에 1이라고 쓰인 형광 연두색 조끼를 입고, 농구공을 가볍게 튕기며 긴 다리로 성큼성큼, 코트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는 다른 반 친구들 몇 명을 혼자 제치고 골대까지 돌진해 골망을 몇 차례나 흔들어 놓기도 했다. 상대 편에 지고 있어 조마조마하던 순간에, 크게 포물선을 그리는 삼점슛을 두 차례 쏘아 성공시키던 ㅁ. 가히 ㅁ이 우리 반을 준결승까지 올려다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체육에는 영 소질이 없다며 반쯤 포기 상태로 구경하던 반 친구들이 목청 높여 소리지르며 관람하게 만들었고, 목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오던 나도 쉰 소리로 소리 치고 손바닥이 부르터라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한다면, 하는 아이였구나


준결승전에서 지기는 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내게 ㅁ은 눈도 잘 안 맞춰 주는 시크한 남자 중학생이라는 이미지에, 관심이 있는 것은 열정적으로 하는 아이라는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나는 내가 느낀 바를 숨기지 않고 모두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구를 했던 날에는 ㅁ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네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정말 멋졌다." 칭찬을 늘어놓았다. 볼 때마다 어깨를 토닥토닥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아니, '칭찬이 절로 나왔다'가 더 정확할지 모른다.)

곧 다가온 ㅁ의 생일에는 카드에 내 생각을 정성껏 적었다.


"ㅁ아. 쌤이 체육대회 때 너한테 반해 버린 거 같아! 무슨 일을 하든 시큰둥해 보이곤 해서 걱정했는데... 이제는 걱정이 하나도 안 되네. 관심만 생기면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해내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 (...) 쌤은 우리 ㅁ이랑 더 친해지고 싶다. 남은 기간 더 가까워지자!"


그리고 며칠 후. ㅁ의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셨다. 나를 찾아온 목적은 뚜렷했다. 상담하시러 오셨겠거니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냐 물으니, '다른 건 필요 없고 성적이 궁금해서, 그것만 보면 된다'고 하셨다. 사실 학교에는 ㅁ의 동생 일로 왔는데, ㅁ의 성적이 궁금해서 들러 본 거라고. ㅁ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공부를 못하는 아들에게 실망했다고, 어쩜 성적이 이럴 수 있냐고 재차 말씀하시는 어머님께 아들의 장점을 몇 번이고 강조하였지만 내 말은 다시 튕겨 나오는 기분이었다. 아들이 참 멋지다, 그런 아들 칭찬해주시라, 대화도 많이 나눠주시라 부탁드리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저는 ㅁ의 동생과 자고, 걔는 아빠랑 자요. 그래서 저랑은 말할 시간이 없어요. 아마 아빠랑 많이 얘기하겠죠. 전 ㅁ보다 ㅁ의 동생이랑 더 친해요."


그 날 오후, 많이 속상해서 옆자리 선생님께 길게 푸념을 했다.



나의 고백이 통했을까?

반 친구들 몇몇과 함께 하는 독서 동아리에서 ㅁ의 말수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다른 생각도 잘 내뱉고, 우스갯소리도 더러 하고.


몇 주 전부터 함께 가자고 제안하고 거절당하기를 반복했던 동아리 체험학습의  바로 전날. 쭈뼛쭈뼛 "저도 갈래요."하며 교무실로 찾아와 신청서를 썼다. 그 덕분에 마침내 ㅁ과 함께 동아리 체험학습을 가게 되었다. 체험학습 장소였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ㅁ은 책을 한 권 사들고 나왔는데, 그 책의 제목은 무려 <나다운 페미니즘>이었다.
"와! 어떻게 이 책을 샀어?"
"그냥요."
(이 말은 ㅁ의 단골멘트, 여전하다.)
ㅁ은 다음날,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출판사 사은품을 깨알같이 챙겨 와 학교에서 쓰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시간표 변동으로 국어 수업을 두 시간 연달아 해야 했다. 잠도 덜 깬 1교시와 2교시 연달아 '음운의 변동'이라는 문법 파트를 공부하려니 30분쯤 지나 하나둘 고개가 떨궈지고, 아이들의 눈동자가 허공으로 떠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시간 내내, 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나의 물음에 큰 소리로 답해 주었다.  


오늘 3교시 쉬는 시간. 4교시가 공강이라 슬쩍 교실에 들어가 복도쪽 맨 끝 빈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안 이곳저곳 서넛이 모여 장난치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괜히 안부 묻듯 말을 걸어 아이들과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혼자 앉아 있던 ㅁ에게도, "졸려?" 한 마디 묻기도 했고.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참견하다가, 어느샌가 ㅁ이 내가 앉은 자리 근처로 와 사물함에 턱 걸터 앉았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혼.자. 땅에 닿지 않는 양다리를 흔들흔들거리며, 아무 말 없이. 나는 가만 앉아 있던 녀석의 시선 끝에 계속 내가 걸려 있었음을 알아챘다.
 
"어? 언제 왔어? 왜 거기 혼자 그렇게 앉아 있누."

"그냥요."

ㅁ은 언제나 그렇듯 "그냥요." 했지만. 여느때와 다름 없는 대답을 했지만. 그랬지만.

내게는 그 날 하루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우리, 가까워지는 중이지?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가 생일 카드 속 내 고백과 시도때도 없는 접근(?) 덕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 더 신경이 쓰이고, 더 챙겨주고 싶어지는 마음. 이대로 앞으로 쭉 친해져만 갔으면 싶다.


그리고 요즘 가장 좋은 건.

가끔이지만  ㅁ이 교실 안에서 햇살 부서지듯 예쁘게 웃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석차를 알려주고 싶지 않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