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이야기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말하려고만 하면 통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다. 하고 싶은 말들과 하지 못할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맴돌기만 한다. 글로 정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로 이렇게 1년, 또다시 4월 16일이 왔다. 그리고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또 다시 마주 앉아 있다.
청소 당번인 A가 며칠째 청소를 하지 않는다. 청소를 잘 하고 가자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청소를 하지 않고 도망갔다. 결국 교무실로 불러다 며칠간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원 차가 데리러 와요. 못 타면 버스 타고 가야 돼요. 늦으면 안 기다려주고 그냥 가요.”
며칠 전, 방과 후 자율 동아리 활동을 권유했을 때 거절한 것 역시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바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단다. 저녁은 챙겨 먹으냐니 대강 먹는단다.
어제는 청소가 끝난 후, 아이들을 보내고 교실 창문을 열고 서서 A가 하교 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청소를 허겁지겁 마친 A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학교와 접한 대로변에 이미 몇몇의 아이들이 모여 서 있었다. 학원 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A의 시선은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꽂혀 있었다. 곧 학원 차가 도착하고, A는 운동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차에 올랐다. 어깨가 축 쳐진 채로.
작년 4월 16일 이후 1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별반 다르지 않게 산다.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이 애타게 원했을 내일의 생이, 여전히 아이들에겐 버텨내야 하는 하루하루로 쌓여 있다.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졸다 깨고, 깨다 졸며 몇 시간을 보낸다.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은 학원으로 가는 버스에 실려 옮겨진다. 학원에서도 또다시 몇 시간을 버티다, 쉬는 시간에 급히 패스트 푸드로 저녁을 때우고 다시 학원으로 올라 간다. 늦은 밤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서야 가족들을 만나게 되지만 잠시일 뿐, 홀로 자기 방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곧 잠이 든다.
뭐라도 좀 바뀔 줄 알았다. 부모님들이 아이를 처음 만날 때 가졌던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라는 바람이 다시금 이야기되고, 그것이 아이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꿀 줄 알았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오늘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자.’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이러한 나의 예상이 그저 긍정적인 교사의 헛된 기대였을 줄이야. 아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많은 어른들의 바람이 모여 무엇인가를 바꿔낼 줄 알았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날, 나와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했고, 그 다음 날에도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했다. ‘세월호 사건을 어찌 하나. 아이들이 불쌍해서 어쩌냐.’ 등의 동정과 연민으로 수업을 시작했던 기억은 난다. 잠깐 울컥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사실 난 또래들의 죽음으로 상처받았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사건에 대해 또렷하게 밝혀진 바도 없었기에 내 개인의 판단을 아이들에게 털어 놓기도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조금 흘러가 정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난 1년간, 아이들에게 세월호 사건의 진실이나 해결방안을 보여주지도, 아이들과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 보지도 못했다. 사건의 진실이 온갖 이해 관계 속에서 호도되고 묻혀 버리는 사이, 아이들은 그 속에서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른 채 눈에 띄는 언론의 말놀이만 따라 하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변한 것은 하나 없으면서, 괜히 수학여행만 못 가게 되었다’고 푸념하는 녀석들이 늘어만 갔다.
아이들 앞에서 나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나머지 무기력했다. 내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일까. 내가 먼저 ‘우리가 사는 방식을 다시 고민해 보자’고 운을 떼었어야 하는 걸까. 그랬으면 무어라도 바뀌기 시작했을까? 오히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다른 때와 다름없이 잘 버티며 살아 주고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세월호 사건 이후, 학교는 각종 행사를 치를 때마다 개인의 안전교육을 강화하고, 아예 수학여행을 회피하는 등의 방식을 선택했다. 올해 세월호 추모 행사는 아이들에게 눈물 한 방울 쥐어짜는 동영상 하나 틀어주고, 인공호흡법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죽은 아이들을 보며 명복을 좀 빌어주렴. 그리고 너희는 사고가 나면 스스로 사는 방법을 터득해서 살아 나오너라.’ 이것이 선생으로서, 어른으로서 해 줄 수 있는 말의 전부인가 싶었다.
1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워 낼 여건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1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이들을 행복하게 키워 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교실 창 밖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 오기는 왔다.
- 2015.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