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떠나지 않았지만, 복음이 들어왔다.”
같은 배우였던 S언니는 나와 유난히 자주 만났다.
이태원에서 빈티지 옷을 함께 고르고, 선릉 무역센터에서 구두를 고르며, 압구정 로데오에서는 카페를 기웃거렸다.
서로의 취향을 들여다보며 연기 이야기, 스타일, 인간관계, 그리고 때로는 사랑 이야기도 나눴다.
우리는 자주, 오래, 그리고 편하게 통화했다.
며칠 뒤, S언니가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지희야, H언니 소개해줄게. 한번 볼래?”
“응? 누구?”
“그 언니 있잖아, 전에 말했던.”
그렇게 우리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 금방 올 거야.”
그 말이 끝나자, 검은색 차 한 대가 골목 끝에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지희지? 나 얘기 많이 들었어. H야. 반가워~”
부드러운 말투와 따뜻한 눈빛.
첫인상은 강렬했지만 묘하게 포근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자연스레 마음이 풀렸다.
그렇게 우리는 차에 함께 올랐고,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묘한 감정이었다.
H언니는 친절했고,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딘가 낯선 기류가 있었다.
S언니는 H언니가 없는 자리에서 종종 그녀의 험담을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H언니가 안쓰러워 보였다.
‘그런 말을 들을 만큼 나쁜 사람일까?’
그녀는 일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두고 그렇게 말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S언니가 조금 속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흐르며 나 역시 H언니의 따뜻한 면과 함께 감당하기 어려운 면도 마주하게 될 줄은.
며칠 후, H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집에 한 번 놀러 와. 커피 한 잔 하자.”
호기심 반, 예의 반으로 찾아간 그녀의 집은 놀라울 만큼 깔끔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공간에는 정돈된 온기가 돌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언니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조심스레 무언가를 내밀었다.
카세트테이프였다.
“이거, 꼭 들어봐. 너한테 정말 필요할 것 같아서 그래.”
“네? 이게 뭐예요?”
“설교 테이프야. 그냥 들어봐. 알게 될 거야.”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고맙다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약간 의아했다.
‘전도하려는 건가?’
하지만 열 살 많은 연기 선배의 정성이 느껴져, 고맙게 받았다.
그날 밤, 잠들기 전 문득 그 테이프가 떠올랐다.
가방에서 꺼내어, 별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질병의 저주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떠나갈지어다.”
순간, 심장이 ‘툭’ 하고 멎는 듯했다.
‘질병? 저주?’
낯설고 묘한 문장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되감아 들었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 문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질병의 저주는 떠나갈지어다…”
그 말이 들릴 때마다 가슴 안쪽이 뜨겁게 울렸다.
‘혹시… 이 병이 나을 수도 있는 걸까?’
‘이 말이 나에게도 해당되는 걸까?’
병원에서는 불치라고 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아주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부터였다.
나는 교회를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예수사랑교회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들은 첫 설교는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들어왔다.
이건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모든 말씀이 내 삶을 향한 메시지처럼 들렸다.
예배가 끝나면 그 말씀을 곱씹었고, 다시 듣고 싶어졌다.
나는 수요예배, 금요철야, 청년예배, 중고등부 예배까지 빠짐없이 참석했다.
사람들은 나를 ‘열정적인 제자’라고 불렀지만, 내 안에는 단 하나의 절박함이 있었다.
‘이 병만 나으면, 다시 연기할 수 있어.’
그 시절의 나는 복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붙잡고 있었다.
기도할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하나님, 제발… 이 병만 고쳐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예배 중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미션홈은 하나님과의 1:1 관계로 바로 서는 최고의 현장입니다.”
그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나는 전도사님께 달려갔다.
“저, 미션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전도사님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기도해 볼게요.”
그날 밤, 나는 다짐했다.
‘그래, 지금이다. 나를 던져보자.’
이번엔 병을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믿음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
그날의 테이프 한 장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병을 치유하려던 말씀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멈춤의 자리에서, 복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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