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열려 있었으나,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보지만 못했던 나에게, 말씀은 보게 하는 눈이 되었다.”

by 치유 보드미

1편. 의식(意識)을 경계하라.

(본문: 눅 6:39–45)

눈은 열려 있었으나, 보지 못했다.

사람은 악해지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사탄은 사람을 괴물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은 열려 있었지만, 빛은 들어오지 않았고,

확신은 가득했지만, 진실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맹인인 채로 다른 맹인을 인도했다.

선의로 말했고, 열심으로 가르쳤지만,

둘 다 같은 구덩이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예수는 이것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진단하셨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문제는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보지 못한 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옳은 말을 하고, 성경을 인용하고, 정의를 말하지만, 서로를 더 깊은 구덩이로 끌고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식이 깨어나지 않으면 열심은 방향을 잃는다.


2편. 식(食)을 경계하라.

(본문: 마 4:1–4 / 요 6:35)

무엇으로 배부르려 하는가

사탄의 첫 시험은 죄를 짓게 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시험이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문제는 떡이 아니었다.

문제는 무엇으로 배를 채울 것인가였다.

사람은 말씀으로 배부르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자신을 채운다.

정보, 분노, 확신, 사람의 말, 자기 의로.

그리고 배부른 것은 결국 입으로 흘러나온다.

그래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의 악한 곳에서 악을 낸다.”


무엇을 먹고 사느냐가 어떤 말을 하느냐를 결정한다.

말씀이 아닌 것으로 배부른 신앙은

반드시 누군가를 상하게 한다.


3편. 주(住)를 경계하라

(본문: 요 15:4–7)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사람은 자주 행동을 고치려 한다.

말을 고치고, 태도를 고치고, 결심을 고친다.

그런데 인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는 곳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상처에 거하고, 분노에 거하고,

두려움에 거하면서 열매만 바꾸려 한다.

예수는 다르게 말씀하신다.


“내 안에 거하라.”


행동을 고치기 전에 거처를 옮기라고 하신다.

거하는 곳이 바뀌면 열매는 자연히 바뀐다.

신앙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머무름의 문제다.


4편. 의식주가 무너지면 경건의 언어를 입은 폭력

(본문: 마 23장 / 롬 2:1)

사탄은 사람을 무너뜨리기보다 판단하게 만든다.

자기 눈의 들보는 감춘 채

남의 눈의 티를 확대하게 한다.

정죄는 경건의 언어를 입고,

비판은 정의처럼 포장된다.

그 사이 회개는 사라지고 사랑은 침묵한다.

예수는 이 시대의 가장 경건한 사람들과

가장 많이 충돌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심은 있었지만

자기 성찰은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주가 무너진 신앙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서로를 소모시킨다.


5편. 다시 세워지는 의식주

예수는 사람을 다시 살게 하신다

(본문: 고후 5:17 / 갈 3:29)

예수는 나쁜 나무를 잘라내지 않으신다.

새 나무로 다시 심으신다.

그래서 복음은 교정이 아니라 재창조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너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회복될 사람이다.

그리스도께 속하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상속자다.

이것이 언약의 힘이다.


6편. 의식주를 회복하는 기도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살게 하신다.

보지 못했던 눈을 열어 주시고,

잘못 먹던 것을 끊어 주시고,

잘못 머물던 자리를 옮겨 주신다.

그래서 기도는 결심이 아니라 의탁이 된다.

오늘도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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