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의 방향
요즘 나는 근심이 많다.
몸이 힘들고,
쉽게 지치고,
예배를 생각하면 마음보다 체력이 먼저 계산된다.
‘오늘은 괜찮을까.’
‘또 떨리면 어쩌지.’
‘끝까지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나는 자꾸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내 몸.
내 상태.
내 한계.
그런데 로마서 9장을 읽다가
조금 다른 근심을 만났다.
바울은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
그의 근심은
자기 몸 때문도,
자기 성공 때문도 아니었다.
자기 민족이 복음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까지 말한다.
그 정도로 그의 고통은
자기 중심이 아니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잠깐 멈췄다.
내 근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요즘 내 근심은
솔직히 대부분 나를 향해 있다.
내가 힘들까 봐.
내가 또 쓰러질까 봐.
내가 버거울까 봐.
그런데 그걸 비난할 수는 없다.
지금 내 몸은 실제로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꿔 보았다.
근심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근심의 방향이 바뀌는 건 아닐까.
바울은 근심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근심 때문에 기도했다.
“왜 이 민족이 예수를 모를까.”
그의 고통은
그를 주저앉히는 고통이 아니라
그를 무릎 꿇게 하는 고통이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간다.
지금은 솔직히
‘주님, 나 좀 덜 힘들게 해주세요’가 먼저다.
그런데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구원은
내 컨디션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이스라엘은 특권을 다 가졌지만
예수를 거절했다.
혈통도, 전통도, 노력도
구원의 기준이 아니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정해진다.
내가 잘해서 붙들린 게 아니라
은혜로 붙들린 존재.
그래서 나는
오늘 조금 힘이 빠져 있어도
약속 밖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다.
내 근심이 아직 나 중심이라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근심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근심을 하나님 쪽으로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님, 나 힘듭니다.”
이 고백도 기도라면,
이미 방향은 바뀌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아직 완전하지 않다.
영적 망대가 단단히 서 있는 날도 있지만,
오늘처럼 무너져 있는 날도 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안다.
나는 선택받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약속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오늘은
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지금은 나를 위한 기도가 먼저다.
그리고 언젠가 내 눈이 더 열리면
나 아닌 다른 영혼을 향해
바울처럼 애통할 날도 오겠지.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는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약속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