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 1–18절, 주일말씀 정리)
나는 요즘 힘들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듣고 나서
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힘든 게, 진짜 문제 맞나?”
몸이 아픈 게 문제일까.
상황이 꼬인 게 문제일까.
사람이 나를 이해 못 해주는 게 문제일까.
아니면,
복음을 받아놓고도
복음을 못 누리는 상태가
진짜 문제일까.
오늘 말씀은
내 고통을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내 고통의 ‘방향’을 물었다.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느냐.”
그 질문이
심장을 정확히 찔렀다.
나는 요즘, 근심이 생긴다.
몸도 마음도 자꾸 무거워진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내게 아주 정직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근심하느냐.”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우냐.”
바울에게도 큰 근심이 있었다.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
그런데 그 근심은 ‘세상 일’ 때문에 생긴 게 아니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이 복음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 두고 울었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내 문제 때문에만 울었던 것 같다.
내 상황 때문에만 숨이 막혔던 것 같다.
근데 바울의 눈물은 방향이 달랐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바울이 특히 아파했던 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받은 게 너무 많았다.
- 하나님이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신 민족
-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민족(성막, 구름기둥, 불기둥)
- 언약을 받았고, 율법을 받았고, 예배를 받았고, 약속을 받았던 민족, 믿음의 조상들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그 혈통에서 메시아가 오셨다
그런데…
그들은 딱 한 가지를 놓쳤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그래서 전부를 놓쳤다.
복음을 받아놓고도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
하나님이 다 줬는데도, 먹지를 못하는 상태.
바울은 그걸 두고 애통했다.
오늘 설교에서 가장 날카롭게 꽂힌 문장이 있다.
“교회 다닌다고 다 영적 이스라엘이냐.”
“육신 이스라엘도 많다.”
나는 이 말 앞에서 괜히 뜨끔했다.
예배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과,
그 예배가 진짜 ‘그리스도’로 향해 있다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오늘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말씀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났다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다.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었다.
한 배에서 나왔어도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
그리고 그 선택의 기준은 사람의 공로가 아니었다.
원하는 자에게서도 아니고, 달음박질하는 자에게서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이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나님, 그럼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바울도 그 질문을 한다.
그런데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결국, 구원은 내가 따내는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건져내는 생명이다.
오늘 내 근심이 바뀌어야 한다
말씀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세상 근심은 사람을 죽인다.
끝이 없다..
돈, 사람, 상황, 억울함, 불안…
세상 근심은 계속 나를 갉아먹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근심은 방향이 다르다.
“내 안에 말씀이 살아있지 않습니다.”
“예배가 집중이 안 됩니다.”
“기도가 끊겼습니다.”
“내 안에 망대가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 안 아픕니다.”
이게 오늘 설교가 말한 진짜 근심이다.
그리고 그 근심은 나를 죽이는 근심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근심이다.
나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졌다
하나님,
내가 아픈 게 문제라면 세상도 다 아픕니다.
하지만 내가 복음을 받아놓고도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건 진짜 울 일입니다.
세상 근심 말고,
하나님의 근심을 내게 주세요.
내 마음의 방향을 바꿔 주세요.
내가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고통하는지,
오늘부터 다시 정렬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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