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언젠가 한 번은 정리해서 적어두려 했다. 나의 코로나 투병기. 내가 병에 걸렸던 2020년 4월은 확진자 동선이 공개되던 시절. 나름, 코로나 얼리어답터였다. 코로나 선구자. 코로나 기미상궁. 12년간의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2020년 4월말에 귀국 예정이던 me. 회사는 4월 15일까지 출근 예정이었고, 거주하던 방은 4월 30일자로 계약 만료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친구네 집으로 옮겨서 일주일 정도 놀다가, 5월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할 예정이었다.
2020년 3월 25일에 나와 함께 퇴사하는 사람들이 총 3명, 송별회가 있었다. 일본은 코로나 걸린 임산부가 병원에 입원을 못해서 사망하고, 자택 격리중에 사망한 샐러리맨 등등. 흉흉한 코로나 뉴스가 매일 보도 되고 있던 시절. 10명이나 모여서 술자리를 한다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타이틀이 내 송별회니 안 갈수도 없는 노릇. 그 전 주말에 마사에 언니랑 점심먹으면서 “다음 주에 송별회 진짜 가기 싫어요. 이런 시기에 왜 굳이 술을 먹겠다고 난리인지” “요즘에 진짜 위험하니까, 조심조심 해” 라고 이야기를 나눴었다. 이때 아마 무의식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던 듯. 식은땀난다. 인터스텔라처럼 시간을 돌려서 송별회고 나발이고, 회사를 당장 그만두라고 말해주고 싶음.
송별회 3-4일 뒤부터 참가자 열세 명 중에, 두 명이 감기기운이 있다며, 출근을 안 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은 pcr 검사가 거의 불가능해서, 감기라고는 하지만 코로나 같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두 명도 코로나였다.) 당시는, ‘나랑은 무슨 상관이겠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4월 1일. 반차를 내고 은행에 가서 볼 일을 보는데 몸이 너무 이상했다. 뭐라 설명 할 수 없이 이상했다. 어지럽기도 하고, 속이 미식거리기도 하고, 눈앞이 팽팽 돌기도 하고. 오전 반차였기 때문에 오후는 사무실 가서 근무를 했다. 앉아있기도 힘들어서, 겨우 시간만 보내고 집으로 갔다.
다음 날 회사는 안가고, 동네 병원에 가서 감기약을 지었다. ‘귀국 전이라 짐 정리하느라 피곤해서 그럴거야. 감기약 먹고 일주일정도 쉬면 낫겠지.’라며, 그때부터는 집에 콕 박혀서, 회사도 가지 않고, 밥 먹고 약 먹고 잠만 잤다. 그런데 점점 증세가 심해졌다. 이마에 해열 시트를 붙이면 바싹 마를 정도로 열이 났다. 다리가 저리는 근육통에, 설사도 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다. 약을 먹고, 물수건을 대고, 무슨 짓을 해도 열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식욕이 없던 적이 없는데, 목구멍으로 밥이 안 넘어갔다. 요리 할 기운도 없어서, 간장 계란밥을 해서 두 숟갈 뜨면 다음부터 밥알을 씹기도 싫었다. 기운 차리려고, 겨우 슈퍼에 가서 비싼 소고기랑 딸기도 사봤다. 그런데, 소고기 맛이 쓰고 느끼해서 삼킬 수가 없었다. 아마 이때부터는 후각 미각도 상실됐던 것 같다. 작은 이모가 감기에는 생강 갈아서 꿀물을 타먹으면 직방이라고 해서 생강을 사서, 강판에 갈고 있는데 이상했다. 생강 냄새가 하나도 안 났다. 아 망한 것 같다. 냉장고의 김치통을 꺼내서 냄새를 맡아봤다. 김치 냄새가 아니고, 형용 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본격적으로 망한 것 같다.
이렇게 혼자 방에서 끙끙댄 것이 열흘 정도였던 것 같다. 컨디션이 좋았던 날도 있고, 아닌 날도 있고. 코로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pcr 검사를 받을 수도 없고, 한국에 있는 가족, 친척, 친구들은 매일 괜찮냐고 연락이 오는데 나도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판단이 안됐다. 부모님은 걱정 되서 전화로 매일 난리가 났는데, 난 그 전화를 받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한국 대사관에 전화도 해보고 하셨는데, 딱히 방도는 없었다. 낮에 정신이 좀 들 때는 넷플릭스 보면서 시간을 겨우 때웠다. 이때 드라마 '봄밤'을 정주행 했는데, 마지막 화는 아직까지 안보고 있네. 몽롱한 정신에도 입가를 씰룩대며 드라마 보던 기억이 난다. 아픈 와중에도 농협 다니는 한지민 구남친은 욕하면서 봤네.
살아서 한국에 귀국은 가능할까. 열이 내리고 부터는 기침이 끊이지를 않았다. 메트로놈처럼 아주 규칙적으로 기침이 터져나왔다. ‘콜록 코올록.’ 특히, 밤에 심해서 한 숨도 못자다가, 아침에 겨우 잠들기를 몇일을 반복. 이러다 죽는거구나 싶었다. 밥은 도저히 안 넘어가서, 아는 언니가 보내준 인스턴트 계란죽 조금 먹고 약 먹고 그랬다. 먹는 것이 힘들어서 식사시간이 무서운 기분은 처음이었다.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니 체력이 나날이 떨어져갔다. 내 한 몸 가누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나중에 병원 가서 보니 2주 동안 4키로가 빠졌더라.
종합감기약을 먹고 버티다가, 약이라도 타볼까 해서, 마스크 꽁꽁 싸매고, 맨 처음 감기약을 탔던 동네 병원에 가봤다. 내 몰골을 보더니, 선생님이 산소포화도부터 재보았다. 내 기억에 93 정도였다. 보통 95이하면, 위험하다고 했다. 선생님이 아무래도 폐렴 같다면서, 렌트겐을 찍자고 했다. 사진을 찍고 봤더니, 폐가 눈 내리는 밤처럼 하얬다. 당신은 폐렴입니다! 렌트겐 사진을 보고는 선생님이 바로 나를 격리시키고, 보건소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피를 3통을 뽑고, 집으로 귀가 조치 당했다. “피 검사를 보건소에서 하고, 나한테 직접 전화를 줄 것 이다.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위해 대학병원을 지정 해 줄 것 이다. 그 곳에 가서, pcr 검사를 받아라.” 다음 날, 보건소 담당자한테 전화가 왔다. 피 검사 했을 때 산소량이 낮다고, 혹시 너무 아프면 구급차를 부르란다. pcr 검사를 받을 대학 병원을 수배 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검사 받기 전에 먼저 죽을 것 같다야. 코로나 증세로 구급차 불러도 병원 배정 못 받은 뉴스만 주구장창 나오는데 뭔 119 구급차 타령이여.
보건소 담당자한테 이틀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pcr 검사를 받을 병원을 수배했다고 한다. ‘오 드디어 나 pcr 검사 받는 것이여!’ 내일 집에서 도보 30분 거리의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란다. 동네 병원서 피 뽑고 대학병원에 가기까지 3일 걸렸다. 타국에서 혼자 사는데 병원까지 태워줄 가족도 없고, 대중교통은 타지 말라고 하니, 폐렴에 호흡도 안 되는 몸을 이끌고 40분을 걸어서 병원에 도착했다. pcr 검사를 하고, ct를 찍고, 그 날로 바로 격리 병동에 입원했다. 이 날 가장 큰 고통은 사타구니 채혈이었다. 여기서 피 뽑아 본 적은 처음일세. (후에 한국서 한 번 더 하게 된다.) 그런데, 검사 받고 바로 격리된다고 누가 말씀이라도 해 주셨으면 제가 짐을 좀 챙겨 왔을 텐데요. pcr 검사 결과가 내일 나오는데 그때까진 아무데도 못 나간다고 했다. 핸드폰 충전기도, 갈아입을 옷도, 물 한 통도 뭣도 없는데 못 나간다고요. 미리 말 좀 해 주지... 한국은 pcr 검사 받고 우선 귀가했다가, 양성이면 구급차가 데리러 온다고 봤는데, 여긴 그냥 못나가는 시스템이었다.
폰 배터리 나가기 전에, 얼른 은영이한테 연락해서 입원 물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외출복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아..목마르다.’ 간호사님께 물은 어떻게 마시냐니까, 지금 코로나 때문에 정수기는 사용금지고, 매점에서 페트병 물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매점가도 되나요?” 아니아니 절대 나갈 수 없단다. 그럼 물을 어떻게 사냐고 했더니, 매일 오전에 간호사들이 환자들이 현금을 주면 그 돈으로 매점에서 물이나 필요한 용품을 사다 준다고 했다. 내일 양성으로 나와서, 병동 배정 받으면 그때 간호사에게 현금을 전달하고, 몇 시간 뒤에 물을 사다주면 마시면 된단다. 이야기를 듣고 은영이한테 바로 카톡해서 500미리 생수 4통을 꼭 사다달라고 했다. 간호사님 심부름 보다 심양파의 구호물자가 빠를 것 같았다. 목이 너무 말라서 수돗물로 가글만 했다. 칫솔도 세안용구도 수건도 뭣도 아무것도 없었다.
목은 마르고, 옷은 불편하고, 입은 텁텁하고 난데없이 입원해서 누워 있을라니 잠이 올 리가 없지. 콧구멍에 산소 튜브 같은 것도 끼워주시기에 그거 끼고 킁킁 거리면서 울다가 잠들었다. 나중에 명세서보니 산소튜브 비용도 추가되어 있더라. 2주 동안 집에서 혼자 앓다가 결국 입원을 하기는 했는데, 이제 여기서 또 언제 퇴원해서, 귀국은 어떻게 하고, 지금 집은 4월말이면 계약만료인데 미치겠다 진짜. 회사 퇴직도, 집 계약도 4월말이면 만료가 되기 때문에, 그 사이에 퇴원을 해서 귀국을 못하면 복잡해졌다. 지금은 그나마 회사 건강보험이라도 적용되지, 퇴직처리 되고 난 다음에 혹시라도 다시 아프면 아휴. 병원비가 아찔하다. 어떻게든 4월내로 나는 귀국을 해야 한다. 내가 이 걱정을 왜 했냐면. 지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입원했을 당시에는, 일본 코로나 입원시 이렇게 진행 되었다.
입원 첫날 검사비, 1인실 입원비는 본인 부담. 건강보험 적용되서 4만엔 정도 나왔다. pcr 양성이 나온 후부터 퇴원까지는 나라에서 부담 해 주는데 우선 병원비는 선불로 내가 대학병원에 내고. 퇴원 후에 서류 한 20장 써서, 영수증이랑 같이 보건소에 보내면, 보건소에서 한 달 뒤쯤에 병원비를 나에게 입금 해 준 댄다. (15만엔 가량) 퇴원하고 나는 귀국을 하고, 캇층이랑, 성미언니가 도와줘서 겨우 서류 내고 환급 받았다. 온라인으로 왜 안 되냐는 의문은 일본에서는 가지면 안 된다. 이건 살아 본 사람만 알 수 있지.
다음 날 아침, 나의 pcr 검사는 양성으로 나왔다. 1인실에서 4인실로 이동 되었다. 은영이가 짐을 한보따리 가져다줘서 간호사님이 전달 해 주셨다. 물 500리터 원 샷 때리면서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 휴 드디어 양치도 할 수 있어. 글로 쓰고 보니, 입원하고는 되게 씩씩 해 보이는데 이때도 나는 밤마다 기침을 하며 숨쉬기도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