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07
격투기 수업 때마다 '내가 이렇게 저질 체력이었나' 실감한다. 본격적인 운동 전 워밍업으로 몇 가지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무릎을 번갈아 들어 올렸다 내리는 단순한 동작도 스무 번이 매번 고비다. "서른 번 시~작!" 헥헥거리면서 하다가 '이제 끝나겠지' 하면 꼭 그게 스무 번이다. 코치님 얼굴을 슬쩍 보는 순간 "스물하나!"가 시작된다. '아, 아까 그 아홉이 스물아홉이 아니었구나...'
힘차게 주먹을 뻗고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작들에서는 코어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윗몸일으키기 수십 번 하는 것보다 복싱 동작 1분이 훨씬 더 힘든 것 같다. 5분, 10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허벅지가 딴딴해지고 옆구리는 찢어질 것 같고 숨이 턱끝까지 찬다. 원투- 훅- 더킹- 위빙- 투- 훅훅- 그날그날 바뀌는 콤비네이션 동작을 반복하는 중간에 짧은 쉬는 쉬간이 있는데 이때 밀린 숨을 헉헉거리면서 몰아쉰다.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은데 그만큼 또 개운하다! 몸속 구석구석 쌓여있던 독소들이 거친 숨이랑 같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다.
"자~ 이제 글러브 벗고 마무리 운동 하실게요!"
더 이상 짜낼 힘이 없는데도 끝나는 건 늘 아쉬워서 밍기적 밍기적 글러브를 벗는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와, 이래선 안 되겠다.' 일단은 체력부터 키워야 수업 시간이나마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꾸준히 다녀야 체력도 좋아지고 기술도 늘텐데 당분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 최선이다. 그렇다고 운동 안 가는 내내 손 놓고 있다가는 매번 제자리걸음일 것 같았다.
달리기라도 해 볼까?
3-40분 빠르게 걷는 동네 산책은 늘 해오던 거지만 여기에 달리기를 추가해 보기로 했다. '30분 내내 달릴 자신은 없고, 걷는 중간중간 1분씩 달리기를 섞어보자' 체육 중에서도 달리는 거라면 질색했던 내가 달리기가 다 하고 싶다니! 그렇게 한동안은 격투기 수업만 하고 오면 체력을 키워야겠다는 조바심에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달리고 나면 왼쪽 무릎이 시큰거려서 꾸준하게 하지는 못했다. 취미로 하던 무용을 무용수라도 될 것처럼 30대가 되어 뒤늦게 무리해서 하다가 무릎이 상한 탓도 있고, 아직 코어를 제대로 쓸 줄 모르니 발목과 무릎에 힘이 많이 실려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달리기는 잠정 보류.
코어 운동이라는 걸 해볼까?
복근 운동을 홈트에 조금씩 섞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에서 요가나 근력 운동 영상은 종종 따라 해 봤지만, 가장 마음이 안 갔던 게 코어 운동이었다. 그래도, 격투기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생전 안 하던 코어 운동 영상을 제일 먼저 틀기 시작했다. '하기 싫은 건 제일 먼저 해치워 버려야지.' 배가 찢어질 것 같은 걸 참고 낑낑거리면서 따라 하다 보면 10분도 한없이 길게 느껴지지만, 배와 등, 옆구리가 미세하게 쫀쫀해진 느낌 덕에 다음날 하루 정도는 기분좋게 살 수 있다.
복습을 해볼까?
사실 수업 때 했던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게 제일이긴 하다. 원- 투- 훅- 더킹- 어퍼컷- 훅- 훅! 배웠던 동작들을 기억나는 대로 섞어서 쉐도우 복싱을 한참 하다가 애플워치를 보면 '뭐? 이제 겨우 3분 지났다고?' 깜짝 놀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칼로리를 이렇게나 많이 썼다고?' 뿌듯해진다. 내 멋대로 연습해서 자세가 더 망가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체육관에서 돌아온 상태 그대로 다음 주에 다시 가는 것과 집에서 매일 10분씩이라도 연습하고 가는 것과는 차이가 꽤 크다.
'나를 방어하는 호신술 하나 득템해야지' 소극적인 마음으로 시작한 격투기인데, 점점 더 일상까지 변하고 있다. 기초 체력이라도 더 키우고 싶고, 자세가 더 정확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더 멋있어 보이고 싶다. 탄탄한 복근과 올라붙은 등근육, 골고루 발달한 팔근육도 갖고 싶다. 레깅스 위로 삐져나온 뱃살이 보일까, 브라탑 아래로 뽈록한 등살이 보일까, 숙였을 때 가슴이 보일까 몸을 꽁꽁 숨긴 헐렁한 티셔츠가 땀에 젖어 척척 감기지 않게 쿨하게 벗어던지고 선수들처럼 브라탑만 입고 운동해보고도 싶다. 몸매가 어떻든 눈치 보지 않고.
갈등 상황이나 불편한 사람은 피하거나 도망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는데 "왜? 뭐!" 눈 똑바로 바라보며 마주 서는 단단한 마음 같은 것도 생겼다. "싸우자! 내가 이겨줄게!"까지는 아니어도 "어디 한번 해보세요. 나도 내 몫을 해볼 테니." 정도의 담담하고도 다부진 마음이랄까.
머리도 점점 더 짧아진다. 수업 영상을 모니터링하다가 이리저리 날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워 보이면 얼른 미용실을 예약한다. "더 짧게 잘라주세요. 자연스럽게 흩날리게 층도 좀 내주세요." 오랫동안 고수해 온 치렁치렁한 긴 머리가 확 짧아지니 거울을 볼 때마다 기분이 산뜻하고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대충 툴툴 털어 말리면 되니 팔이 아프도록 드라이기로 말리던 시간도 확 줄었다.
내가 잘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시작한 운동이지만 '난 당연히 못할 거야.'라는 생각에서도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졌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 혼자 서서 주어진 시간을 이끌어야 하고, 15년 가까이 해온 일이니 프로처럼 보여야 하고 또 당연히 잘 해내야 하는 본업 대신 못해도 되는 일, 초심자인 일이 주는 느긋함이 한동안은 좋았다. 안락했고, 달콤했다.
그랬던 시간 덕분에 이제는 못해도 괜찮은 마음을 놓아줄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더 나를 단련시켜 보자. 더 강해져 보자. 까짓 거, 잘해보기도 하자!